나는, 인도 콜카타(구. 캘거타)-정확하게는 '마더 테레사의 집'-를 향한 동경이 있다. 그 동경은, 조병준 선생님(≪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이 제공했다. 책을 통해 선생님의 친구들과 만나면서, 마더 테레사에 의해 설립된 커뮤니티에 대한 어떤 동경 혹은 Must-visit의 장소로 각인돼 있다. 인도에 다녀왔지만, 나는 이곳을 들르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꼭 다녀오리라 마음 먹고 있던 터였다.
나는, 어떤 의심도 하질 않았다. 마더 테레사에 대해. 그는 세계의 '마더'가 아닌가. 그 이름은, 아주 저명한 고유명사이며, 선행(희생)과 이타심의 표상. 어디 감히 이기심과 세속성이 범벅된 나 같은 자가 흠결을 가할 수 있겠는가. 빈민(貧民)들의 수호천사이자, 살아생전 이미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그를.
그러나, 따지고보면, 미디어들이 주입시킨 것이다. 그를 향한 온갖 미사여구와 예찬의 기저에는 미디어의 호들갑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를 의심않았던 건, 미디어들이 조장한 그의 명성과 후광에 압도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긴, 그를 향해 숭배까지 한 건 아니었다. 숭고하다고 퍼진 그를 성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야위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에게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애초 내가 보고 접하고 싶었던 것도, 커뮤니티와 사람들이었지. 테레사 할머니는 아니었던 게지.
그녀를 믿지 마세요
어쨌든, 그 성인은 범속과 타락이 일상화된 범인으로 내려앉았다. ≪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김정환 옮김, 모멘토 펴냄)은, 때론 오도되고 부풀려진 테레사 수녀의 실체에 똥침을 날린다. 경건함과 성스러움으로 치장한 테레사 수녀의 본질이 어쩌면 다국적 선교사업체의 수장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사업가일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
거짓말 말라고? 이미 카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성인의 경지에 오른 테레사 수녀를 모함하는 수작이라고? 그러나, 비판과 우상파괴 작업은 구체적이다. 증거를 들이대며 쟁점과 논리를 따진다. 히친스가 '이의 제기자'이자 '우상파괴자'라는 레떼르를 수여받은 이유다.
히친스가 전한 논거가 꾸며진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위대한 수녀'는 없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실존적 구원으로 이끌지 못했다. '영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레토릭의 구사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수녀원 운영은 세속의 원조에 의존했으면서도,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세속에는 주저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인다.
테레사 수녀가 운영한 의료시설에선 변변한 검사도 없었다고 한다. 환자들에게는 항생제와 해열진통제를 무작위로 처방하고. 그러면서도 정작 테레사 수녀 자신은 심장 질환 및 노환으로 고생할 때, 선진국의 가장 우수하고 값비싼 병원들에서 치료를 받았다니, 거참. 그가 좋은 병원에서 치료 받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필요한 일에 돈을 써서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왜 소홀했는가를 타박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일했던 수전 실즈의 고백은, 테레사 수녀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아니면 철저히 위장된 봉사에 임했음을 짐작케 한다. 너른 거실을 침대가 꽉 들어찬 공동 침실로 변형하면서, 겨울 내 불을 떼지 않아 몇몇 수녀들이 폐결핵에 걸린 일은 약과였다. 수녀들은 가난을 호소하고, 손 크고 어수룩한 사람과 기업들이 더 많은 재화와 봉사와 현금을 내도록 조종할 것을 강요받았단다.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기부금은 하느님이 마더 테레사의 모임을 어여삐 여긴다는 증표로 여겨졌다... 기부금이 밀려오고 은행에 예치되었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금욕적인 생활이나 우리가 도우려 애쓰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말도 안되는 일 아닌가. '가난'에 대한 형이상학적 집착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다름아닌 가난한 자들이라는 사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복지' 따위가 아니다. 눈 앞의 빵이 더 중요하고, 아픔을 제대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시설이 필요하다. 그걸 몰랐던 걸까. 몰랐다면, 테레사 수녀는 백치고, 알았다면, 얍삽한 선교사업체의 수장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마케터
테레사 수녀는, 그래서 마케터로서의 능력(!)도 보여준다. 기부금을 타내는 수완과 능력이 출중했다고나할까. 어떤 돈이든, 그는 출처를 가리지 않는다. 테레사 수녀의 명성을 이용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파렴치범들을 옹호까지 해댔다. 거액의 기부금을 낸 이유 때문인지, 테레사 수녀는 뻔뻔하기도 하다. 아이티의 독재자를 옹호하고, 사이비 종파지도자와 희대의 사기범죄자에게 자신의 명성을 빌려줬다. 심지어 법원에 탄원서까지. 사기꾼의 기부금을 피해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검사보의 편지에도 어떤 반응도 않았다.
히친스는 말한다. "부유한 세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무언가 제3세계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기를 좋아하고, 믿기를 원한다... 선교가 배달되는 진짜 주소는 후원자와 기부자의 자기만족이지 짓밟힌 자들의 필요가 아니다. 의지할 데 없는 아기들, 버려진 낙오자들, 나환자와 말기 환자들은 동정의 과시를 위한 원자재들이다." 너무 적나라한 말이 아닌가 싶지만, 핵심을 벗어난 지적은 아니다. 히친스의 결정타. "이 거짓된 위안의 세계적이고 지도적인 대변자, 마더 테레사 자신이 우중선동가이며 우민정책가이고 세속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다."
미디어 역시 테레사 수녀의 거짓 이미지 증식에 절대적인 동조를 한 터이다. 히친스는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소문과 신화가 갈수록 더 빠르고 효율 있게 어리석은 대중의 눈과 귀에 가닿은 것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일례로, 1969년 BBC방송의 다큐멘터리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것>에서 조장한 가짜 '기적'이 신화의 직조에 가담했다. 이를 만든 맬컴 머거리지는 빛이 거의 없는 실내에서 찍은 장면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빛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개거품을 물었다. "화가들이 성자의 머리 둘레에서 보아내고 가시화했던 후광"이라며, 그것이 '기적'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촬영감독은 코닥필름의 신제품이 이같은 효과를 냈다고 증언하면서 이 '기적'을 간단히 뒤집는다. 해프닝인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는다. 절절한 신앙을 가진 어떤 이들. 기적을 믿고픈 어떤 이들.
'테레사', 그 이름만으로 감동이 밀려오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불치병을 가진 사람이야 눈길을 줘선 안될 터이지만, 세상의 거짓된 이름과 명성에 속지 않고픈 사람에겐 필독. 우상의 허물어짐을 감내할 수 있다면. 다만, 내용이야 둘째치고 번역의 수준은 짜증을 수반한다. 이는 내용의 전달에도 영향을 미칠 터인데, 비문 등 번역은 부실하다.
나는, 어떤 의심도 하질 않았다. 마더 테레사에 대해. 그는 세계의 '마더'가 아닌가. 그 이름은, 아주 저명한 고유명사이며, 선행(희생)과 이타심의 표상. 어디 감히 이기심과 세속성이 범벅된 나 같은 자가 흠결을 가할 수 있겠는가. 빈민(貧民)들의 수호천사이자, 살아생전 이미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그를.
그러나, 따지고보면, 미디어들이 주입시킨 것이다. 그를 향한 온갖 미사여구와 예찬의 기저에는 미디어의 호들갑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를 의심않았던 건, 미디어들이 조장한 그의 명성과 후광에 압도돼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긴, 그를 향해 숭배까지 한 건 아니었다. 숭고하다고 퍼진 그를 성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야위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에게 관심을 둘 이유도 없었다. 애초 내가 보고 접하고 싶었던 것도, 커뮤니티와 사람들이었지. 테레사 할머니는 아니었던 게지.
그녀를 믿지 마세요
어쨌든, 그 성인은 범속과 타락이 일상화된 범인으로 내려앉았다. ≪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김정환 옮김, 모멘토 펴냄)은, 때론 오도되고 부풀려진 테레사 수녀의 실체에 똥침을 날린다. 경건함과 성스러움으로 치장한 테레사 수녀의 본질이 어쩌면 다국적 선교사업체의 수장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사업가일 수도 있다는 문제 제기.
거짓말 말라고? 이미 카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성인의 경지에 오른 테레사 수녀를 모함하는 수작이라고? 그러나, 비판과 우상파괴 작업은 구체적이다. 증거를 들이대며 쟁점과 논리를 따진다. 히친스가 '이의 제기자'이자 '우상파괴자'라는 레떼르를 수여받은 이유다.
히친스가 전한 논거가 꾸며진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위대한 수녀'는 없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실존적 구원으로 이끌지 못했다. '영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레토릭의 구사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수녀원 운영은 세속의 원조에 의존했으면서도,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세속에는 주저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인다.
테레사 수녀가 운영한 의료시설에선 변변한 검사도 없었다고 한다. 환자들에게는 항생제와 해열진통제를 무작위로 처방하고. 그러면서도 정작 테레사 수녀 자신은 심장 질환 및 노환으로 고생할 때, 선진국의 가장 우수하고 값비싼 병원들에서 치료를 받았다니, 거참. 그가 좋은 병원에서 치료 받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정작 필요한 일에 돈을 써서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왜 소홀했는가를 타박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시설에서 일했던 수전 실즈의 고백은, 테레사 수녀가 형이상학적이거나 아니면 철저히 위장된 봉사에 임했음을 짐작케 한다. 너른 거실을 침대가 꽉 들어찬 공동 침실로 변형하면서, 겨울 내 불을 떼지 않아 몇몇 수녀들이 폐결핵에 걸린 일은 약과였다. 수녀들은 가난을 호소하고, 손 크고 어수룩한 사람과 기업들이 더 많은 재화와 봉사와 현금을 내도록 조종할 것을 강요받았단다.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기부금은 하느님이 마더 테레사의 모임을 어여삐 여긴다는 증표로 여겨졌다... 기부금이 밀려오고 은행에 예치되었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금욕적인 생활이나 우리가 도우려 애쓰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말도 안되는 일 아닌가. '가난'에 대한 형이상학적 집착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다름아닌 가난한 자들이라는 사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복지' 따위가 아니다. 눈 앞의 빵이 더 중요하고, 아픔을 제대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시설이 필요하다. 그걸 몰랐던 걸까. 몰랐다면, 테레사 수녀는 백치고, 알았다면, 얍삽한 선교사업체의 수장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마케터
테레사 수녀는, 그래서 마케터로서의 능력(!)도 보여준다. 기부금을 타내는 수완과 능력이 출중했다고나할까. 어떤 돈이든, 그는 출처를 가리지 않는다. 테레사 수녀의 명성을 이용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파렴치범들을 옹호까지 해댔다. 거액의 기부금을 낸 이유 때문인지, 테레사 수녀는 뻔뻔하기도 하다. 아이티의 독재자를 옹호하고, 사이비 종파지도자와 희대의 사기범죄자에게 자신의 명성을 빌려줬다. 심지어 법원에 탄원서까지. 사기꾼의 기부금을 피해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검사보의 편지에도 어떤 반응도 않았다.
히친스는 말한다. "부유한 세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무언가 제3세계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기를 좋아하고, 믿기를 원한다... 선교가 배달되는 진짜 주소는 후원자와 기부자의 자기만족이지 짓밟힌 자들의 필요가 아니다. 의지할 데 없는 아기들, 버려진 낙오자들, 나환자와 말기 환자들은 동정의 과시를 위한 원자재들이다." 너무 적나라한 말이 아닌가 싶지만, 핵심을 벗어난 지적은 아니다. 히친스의 결정타. "이 거짓된 위안의 세계적이고 지도적인 대변자, 마더 테레사 자신이 우중선동가이며 우민정책가이고 세속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다."
미디어 역시 테레사 수녀의 거짓 이미지 증식에 절대적인 동조를 한 터이다. 히친스는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소문과 신화가 갈수록 더 빠르고 효율 있게 어리석은 대중의 눈과 귀에 가닿은 것을 보장한다"고 말했다. 일례로, 1969년 BBC방송의 다큐멘터리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것>에서 조장한 가짜 '기적'이 신화의 직조에 가담했다. 이를 만든 맬컴 머거리지는 빛이 거의 없는 실내에서 찍은 장면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빛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개거품을 물었다. "화가들이 성자의 머리 둘레에서 보아내고 가시화했던 후광"이라며, 그것이 '기적'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촬영감독은 코닥필름의 신제품이 이같은 효과를 냈다고 증언하면서 이 '기적'을 간단히 뒤집는다. 해프닝인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는다. 절절한 신앙을 가진 어떤 이들. 기적을 믿고픈 어떤 이들.
'테레사', 그 이름만으로 감동이 밀려오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불치병을 가진 사람이야 눈길을 줘선 안될 터이지만, 세상의 거짓된 이름과 명성에 속지 않고픈 사람에겐 필독. 우상의 허물어짐을 감내할 수 있다면. 다만, 내용이야 둘째치고 번역의 수준은 짜증을 수반한다. 이는 내용의 전달에도 영향을 미칠 터인데, 비문 등 번역은 부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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