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비. 그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아마, 1999년인가, 2000년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광고업계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접촉하게 됐는데, 어떤 연유인지 생각나진 않지만, '오길비 앤 머더'의 한국지사에 소속된 사람을 만났다. 물론 내가 광고업계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따라 삼성동 부근에 위치한 오길비 한국지사의 사무실도 엿봤다. 그를 통해 들었다. '오길비'가 얼마나 대단한 양반인지, '오길비'라는 이름이 광고업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오길비 앤 머더'가 단순 광고대행사만은 아니라는 것 등등. 좀더 자세하게 그가 광고계에 어떤 족적을 남기고 어떤 작품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그 이름은 광고계의 전설처럼 느껴졌다. 이후 아주 간혹, 무언가를 통하든 '오길비'를 보거나 듣게 됐을 때, 가끔 그때를 생각했다.
그후로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오길비'라는 이름. 그 이름을 다시 상기해준 책이 나왔다. 1993년 《어느 광고인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된 바 있던 책이, 개정판을 옮기며 서문과 어록 등을 추가해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는 제목으로 재탄생했다. 만나보고 싶었다. 허투루 그가 광고계의 전설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닐 터.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는 '광신(광고계의 신)'의 진면목이 나와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같은 것. 어떤 철학과 원칙으로 광고와 (소비)세상을 흔들었는지, 어떤 미혹이 있었는지, 현대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광고에 대한 어떤 이야길 들려줄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은 '구문'이었고, 광고업계나 관련업계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닥 효용을 느끼기 어렵달까. 물론 그의 통찰과 성찰이 빛나는 대목도 간혹 나와줬지만,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의 이야기는 빛나는 성공사를 바탕으로 후배 광고쟁이들을 대상으로 건네는 강의 같았다. '광고쟁이들의 바이블'로는 충분히 빛을 발하겠지만, 광고를 통해 세상을 좀더 주의깊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기엔 부족했다.
오길비는 시종일관 '광고'를 이야기했다. 이미 광고업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숙지하고 있을 법한 이야기이겠고, 광고에 입문하고픈 이들이라면, 주옥같은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 같은 일반인들에겐 뭐랄까. 그냥 흘려들어도 좋을만큼의 광고사 같다는 느낌? 광고사나 광고업계에 대한 상식을 좀더 쌓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내 기대가 좀더 뻗어나가있었다는 거지. 대중과 세상의 일상을 폭탄처럼 둘러싸고 있는 광고의 속살에 대한 좀더 세밀한 접근을 내가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의 자랑 같았다. 당연히 그는 스스로를 자랑해도 되는 인물이다. 딱히 거부감은 없다. 그만큼 그의 성과는 눈부시고, 그의 철학은 충분히 지금에서도 빛을 발할 부분이 있었다. '해서웨이 셔츠'를 일약 미국의 국민 셔츠로 도약시키고, 미국인들에게 지저분한 나라로 편견 가득했던 프레르토리코의 이미지를 개선시킨 활약도 펼쳤다. 미국이나 영국의 관광 이미지 또한 그의 손과 머리를 통해 새롭게 바뀌었다.
더구나 책을 통해 만난 그는 솔직하고 소양과 양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인간의 훌륭한 창조물의 대부분은 돈을 벌고자하는 욕구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소비)세상의 작동원리부터,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무엇을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사실을 말하라,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의 가족이 읽지 않았으면 하는 광고는 만들지 마라 …" 등 '매직 랜턴'이라 부르는 그의 원칙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말을 잘한다"고 반응한 에스키네스의 연설보다, "필립왕을 타도하자"고 사람들의 동요를 이끌어낸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을 편든 그는, 분명 '광고의 역할과 기능'을 온몸으로 체화한 인물이다.
분명 미덕도 존재하는 책이지만, 나는 구문에 가까운 그의 말들이 걸린다. 가령 그가 좋아하는 태도라고 밝힌 한 대목. '불변의 법칙'이라고 밝힌 그의 태도엔 이런 것이 있었다. 자신의 회사 안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결혼 후 그중 한 명은 떠나야 하며, 될 수 있다면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여자가 떠나는 것이 좋겠단다. 또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죽는 사람은 없다'는 스코틀랜드 속담을 믿는다며, 일을 많이 하란다. 지금 시대와는 유리된 이런 말들이 종종 나는 목에 걸렸다. 물론 1962년에 쓴 책이고, 내가 광고업계의 속살을 잘 모름을 감안하면, 분명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
읽는 사람마다, 책을 선택하고 읽는 포인트가 다르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다르겠지만, 나는 별다른 오르가슴을 느낄 수가 없는 책이다. 밋밋한 구문. 하지만, 광고쟁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그의 마지막 일갈은 뜨끔하다. "광고는 폐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현재 오길비를 바이블처럼 여기는 광고쟁이들에게나, 광고의 폭탄에 매순간 폭격당하는 일반인들에게나, 지금의 광고를 생각하게 만든다.
P.S... 다시 낸 책임에도, 오타가 눈에 많이 띈다. 번역이나 편집 시에, 불성실했다는 증거다. 책 읽기를 방해하는 요소임을 밝혀둔다.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정무역'이 당신에게 던지는 이야기 한자락 (6) | 2008.05.10 |
---|---|
[한뼘] 궁색한 경찰과 똑똑한 여학생 (0) | 2008.05.08 |
너에게 켄 로치를 권한다 … <빵과 장미> (2) | 2008.05.01 |
[한뼘] 장애인 (2) | 2008.04.20 |
[한뼘] 삽질정국 (0) | 2008.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