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브라운관에는 병원(의사)이 차고 넘쳤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싫건 좋건 간에 인간으로서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를 한 그릇에 담는다면 병원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또한 병원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이 생을 부여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낳는 공간은 병원이다. 그리고 태어남으로써 부여받는 죽음의 권리와 의무. 그것 역시 따지고 보면 병원에서 부여받는 셈이 아닌가. 병원은 그래서 아마도 우리 생애 최초의 공간일 것이다. 생과 죽음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를 준다. 어쩌면 사람들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생애 첫 공간에 대한 기시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낯설지만 익숙한. <종합병원> <의가형제> 등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한 의학드라마(병원을 주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는 <하얀 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등을 통해 업그레이드됐다.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또한 의학드라마의 흥행에 기여했다.
사실 대개의 사람들은 병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엔 (병이나 질환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이 우선 존재한다. 환자를 보거나 문안하는 사람도 편치 않다. 병원 특유의 우울함도 깔려있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절대적인 권력관계도 한몫한다. 의사는 어쩔 수 없는 절대자이며 환자는 절대 복종자가 된다. 많은 의사들은 친절하다기보다는 권위적이고 환자를 위한 배려가 깊지 않다. ‘병’을 놓고 어쩔 수 없이 환자와 의사 사이에 주어지는 권력관계지만 그것은 그닥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학드라마를 즐긴다(시청률이 높았다). 왜일까. 모르긴 몰라도 병원에는 극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과 죽음을 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는 긴박감 같은 것. 어느 순간 내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 혹은 내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편하게 마주대할 수 있었던 <뉴하트>
기실 <뉴하트>가 다른 의학드라마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병원 내외부를 오가면서 생과 사의 의예를 펼치는 의사들이 주도하는 드라마. 그럼에도 <뉴하트>는 기존 의학드라마보다 편하게 마주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특정 사안을 놓고 길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야기의 호흡이 적당했다. 갈등으로 인한 긴장감을 적당히 불어넣은 뒤 그를 해소하는 과정이 시청자의 안달복달을 유도하지 않아서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덜했다. 캐릭터 또한 이야기에 복무할 수 있을만큼만 존재했다. 번잡스럽거나 장황하지 않은 캐릭터들의 작고 소소한 이야기가 충분히 먹혔다고나할까. 그렇다고 <그레이 아나토미>마냥 한회 분량에서 이야기를 종결하는 구조도 아니었다.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분량의 절충된 구조였다.
그리고 어떤 갈등이 해소될 때 희망의 지점을 찾고자 하는 점이 <뉴하트>의 미덕이었다. 물론 늘 좋은 결과만 있는 것이 병원이 아니듯, <뉴하트>도 죽음과 의학의 한계가 묘사되긴 했다. 환자가 결국은 죽거나 은성(지성)이 놓친 환자가 반신불수가 되는 그런. 그럼에도 막연한 희망을 심어주진 않았다. 희망의 에너지를 적당히 주입하는 센스가 돋보였다.
의사들의 율법에 반기를 든 꼴통들
<뉴하트>에는 2명의 ‘꼴통’이 있다. 최강국(조재현)과 이은성(지성). 그들이 꼴통인 이유는, 의사 세계의 율법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람 생명을 다룬다손 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다. 인간이 있는 어느 세계에서나 전통 혹은 관습이라는 이름의 율법이 존재한다. 그 율법은 개인의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고 조작한다. 특정 세계에 속한 개인이 그 세계의 율법을 깨뜨리기란, 당최 어렵다. 아무리 좋은 율법이라도 개인은 억압받는 존재다. 개인이 가진 욕망과 의지는 기실 율법 앞에서 부유하기 마련이다.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긴 것도 두 꼴통의 ‘율법 거부’가 아니었을까. 율법에 묶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로망이 그것이다. 꿈에서라도 가능할까. 율법을 거부한다는 것이. 두 꼴통은 율법을 거부하는 행각(?)을 저지른다. 최강국이 꺾이면 다시 이은성이 이어받는 율법 거부의 행렬. 그것이 바로 <뉴하트>의 매력이었다.
한편으로 율법 거부가 영원한 낙마로 이어지지 않고 부활로 반전된 것은 <뉴하트>가 시청자들을 의식한 결과로 보여진다. 박재현 원장(정동환)이 제시한 제안을 거부한 탓에 초대 심장혈관센터장이 아닌 고문으로 낙마하는 듯 했던 최강국이 마지막 회에서 센터장으로 부활하는 이야기. 이은성도 마찬가지다. 지방의 타대학교 출신으로 괄시를 받아 처음부터 위태위태한 마당에 환자를 향한 드넓은 오지랖은 의당 미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극 중 부상도 입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가출(?)하면서 낙마 할 뻔도 하지만, 그는 얼어죽지 않는다. 시청자들의 몰입대상을 충분히 고려한 ‘꼼수’다. 반면 그것은 시청자들이 누구를 향해 애정을 품고 있는지를 눈치 챈 작가와 연출자의 ‘묘수’다. 꼼수와 묘수가 조화를 이룬 것이 율법을 거부한 꼴통의 부활이다.
나는 그래서 최강국과 이은성에게 마음이 쏠렸다. 무릇 의사라면 환자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것을 걸어야한다는 명분 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은 타자의 율법에 갇히기보다 스스로 ‘무능한’(의술과는 무관한) 의사를 택했기 때문이다. 의사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의사 아닌 사람들이 바라는 의사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다. 인간적이고 자신의 마음이 내는 목소리를 따르는. 물론 율법을 어긴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과는 별도로 말이다. 그들의 세계가 또한 그들을 온전히 방목해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병원에 가면 절대 약자인 환자일 수밖에 없는 내가 아는 ‘좋은 의사’는 그렇다. 환자에게 친절하고 인간미를 보여주는. 환자 앞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의사가 병의 상태를 떠나 절대적 불안 상태에 있기 마련인 환자를 다룰 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또 사람을 존중하고, 특히 장애인이나 환자와 같은 약자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전문가들의 마음과 태도. 물론 관념일 뿐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나는 의사는 의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과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만큼 의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심히 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의사(醫師)’인 것이다.
10년이 훨씬 넘은 세월 전에 보았던 영화 <유망의생>에선 인간미와 선의로 똘똘 뭉친 의사가 나온다. 양조위가 분한 ‘유문’이라는 의사는 집창촌을 전전하며 환자들과 만난다. 돌팔이 소리도 가끔 듣고 욕심도 없는 그는 환자에게 어떤 사연이 얽히고 설켰든, “의사는 살릴 수 있는 병자는 끝까지 치료해야지”라고 말한다. 그저 의술이 필요한 곳에 자신을 둘 뿐. 분명한 원칙임에도 지금-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영화는 넌지시 말했다. “Be a doctor and not a medical broker.”
나는 이은성과 최강국에게서 그런 모습을 봤다. 브라운관을 통해 ‘아, 저런 것도 있구나’ 혹은 ‘어딘가에는 저런 모습도 있겠지’하는 희망을 떠올렸다. 그래서 모르긴 몰라도 이은성은 좋은 의사가 될 것이다. <뉴하트2>가 제작될 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지닌 희망의 빛깔이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긴다. 율법을 어겼지만, 그 율법의 거부가 환자를 향한 것이라면 마땅히 환영받아야 한다.
<뉴하트>는 그렇게 시청자 각자가 처한 율법의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미덕이 있다. 견고하고 암울한 현실의 율법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자에 의해 강요된 율법이 아닌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삶에 충실할 수 있을까. 우리가 꿈꾸는 세계를 온전히 꾸려나가고, 이 격변하는 세상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작은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최강국과 이은성을 통해 대리만족을 꾀하기 위해 그들에게 빠져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명백백한 선과 악의 구분이 없는 <뉴하트>
방영직전 <하얀거탑>의 짝퉁 의혹도 받았으나 <뉴하트>는 분명 캐릭터와 드라마가 달랐다. 다만 <하얀거탑>이 연상된 것은 선악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김명민)을 무턱대고 악인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듯, 박 원장이나 김태준(장현성), 민영규(정호근)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실력만큼 자리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컸다는 것. 그래서 그들 또한 우리였다. 어떻게든 정글 속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면서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발버둥치는 인물들. 시청자라는 껍질을 벗고 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네들이 더 심적으론 가까운 인물이 아니었을까.
김태준의 콤플렉스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천재외과 의사라는 칭호도 받고 유수의 의학전문지에 논문이 실릴 정도의 실력이었음에도 최강국에 가린 2인자였으니까. 신중함이나 권력욕 또한 2인자였기에 발현됐을 가능성이 크다. 박원장도 그렇다.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딸 때문에라도 박원장은 더더욱 자리보전과 더 높은 곳을 향해야 했다. 결함을 감추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
아마 쉽게 가자면, ‘착한’ 돌팔이 의사와 ‘나쁜’ 전도유망 의사의 구도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의학드라마 구도는 분명 그렇지 않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도 그만큼 높아졌고 작가나 연출자의 태도 또한 단순 선악구도가 주는 재미에는 한계가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최강국이 과하게 자신을 과신할 때도 냉정했던 그들이야말로 돌아이 기질의 최강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기제였다.
무엇보다 <뉴하트>는 캐릭터가 살아있어서 더욱 살가웠다. ‘조연도 멜로도 살아있는 드라마’라는 평가는 정당하다. 때론 후배나 간호사들을 태우고(괴롭히고) 웃음폭탄을 안기면서도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뒤질랜드’ 배대로(박철민)를 비롯, 이승재(성동일), 조복길(정경순), 김미미(신다은) 등은 리얼한 감초가 어떻게 드라마와 조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뉴하트>의 캐릭터들은 전반적으로 과잉으로 치닫지 않고 의사들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재미를 줬다.
다만 캐릭터의 변화가 갑자기 이뤄진 것은 다소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아마 캐릭터 구축을 위한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겠지만 생략된 탓이라 여기고는 있지만 후반부의 갑작스런 사건이 주는 변화는 다소 맥이 풀리는 부분이 되기도 했다. 좀더 촘촘했더라면 좋았을 법한 아쉬움.
나는 소망한다, 세상에 빛과 열을 전파하는 ‘의사’선생님을 만나길
그곳에도 야망과 권력을 비롯해 인간의 적나라한 관계망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병원은 그저 무대이자 장소일 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병원 아닌 다른 무대를 대입시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인간관계가 있었다. 이른바 ‘문명화된’ 인간들의 행태는 엇비슷하다. 박 원장을 위시한 정치적 관계망을 보자면 병원도 ‘사악한 존재’로 상징화된 뱀들의 소굴과도 같다. 독성이 묻은 혀를 날름거리다가 표적이 노출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물어버리는 존재들.
그러나 최강국, 이은성과 같은 의사도 있는 것이 또한 병원일 것이다. 양심을 접고 출세와 영욕을 좇기보다는 자신만의 가치를 지키고 사는 그런 의사들도 있는 곳. 물론 세상은 여러 갈래 길에서 평생 고민하면서 살아가게끔 요구한다. 최강국과 이은성이라고 왜 흔들리지 않겠는가. 작은 바람에도 휩쓸리거나 흔들리는 것이 본디의 인간인데.
‘지금-여기’의 많은 병원 혹은 의사들에게 생명과 윤리, 환자와의 교감 등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마냥 그저 박제된 유물일지도 모르겠다. 의학계 뒷편에도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음모배틀’이 횡행하는 정치적 무대가 마련돼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상에서 접했던 의사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만났던 의사 사이에는 괴리감이 일정부분 있었다. 여느 일상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의사‘선생님’이라면,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어떤 의사들은 세상에 빛과 열을 전파하는 ‘의사’선생님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소 부정적이다. 환자를 긍휼(矜恤)히 여기고 온갖 친절과 성심을 다해 사람과 병을 다스리던 허준 의원의 이야기는 로망이다. 천민자본주의가 창궐하는 현실에 그것이 가능키나 한 얘기일까.
그래도 나는 <뉴하트>를 보면서 간절하게 바랐다. 어쩌면 세상에 없을 법한 의사일지라도, 지금 현실 세계에서 꼭 만날 수 있기를. 율법을 거부한 의사들의 손을 들어주는 현실과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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