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생의 대극으로서가 아닌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서였다. 충격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죽음과 생을 분리해 놓은 분리주의자였다. 그래서, ‘죽음’은 너무도 두려운 무엇이었다. 죽음을 처음 진지하게 생각했던 초등 5학년 때부터 죽음은 그랬다. 그런데, 소설 속 그 짧은 구절하나가 심장에 박혔다. 죽음과 생. 그래도, 어려운 문제였다. 이후 세월, 아무리 접하고 (간접적으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함께 취득하는 권리가, 죽음이다. 싫건 좋건, 누구나 똑같다.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다. 생과 죽음은, 그렇게 한 몸이다. 자웅동체다. 암수한쌍이다. 결국 맞는 말이다. 죽음이 생의 대극이 아닌 일부라는 사실은. 태어남이 곧 죽음과 통한다니, 재밌고도 아이러니한 진실이 아닐손가. 우린 그렇게, 진실을 부둥켜안고 태어났다. 허허.
사람들은 알고 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그래서 누구나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간다. 특히 많은 사람들, 아등바등 살아간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놀랄 일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자.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그렇게 헤맨 것을 생각하면, 영생불사의 영약을 찾은 숱한 권력자들을 떠올리자면, 아마도 죽음은 두려움의 존재가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경시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생명연장의 꿈’. 그래, 현대라고 다르지 않다. 공공연히 그 말은 회자된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오래 살고 싶다고 외친다. 그거야 당연한 욕망일손. 그걸 타박하자는 거,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생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 ‘죽음’도 공공연히 얘기하자는 것이다. 죽음을 쉬이 입에 담긴 힘든 무엇으로만 봉합하지 말고 말이다.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해 얘기하듯 누구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얘기할 수 있다면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얘기를 자주할 수 있다면, 환자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도 될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p. 232)
엘리자베스의 죽음학은 특히 죽음을 선고받고 죽어가는 자들, 즉 시한부 환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죽음에 대한 저항이 아닌 죽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말한다. 책의 미덕은 곳곳에 뿌려져 있다. (근거 없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보다 (눈앞에 닥칠) 진실을 얘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단다. 그것은 죽어가는 자나 남아있는 자에게 모두 좋은 것이다. 죽음 앞에 선 환자나 가족 모두에게. 육체나 감정 모두의 노동과 낭비를 줄일 수 있는, 효용성 있는 방법.
그의 죽음학은, 어렸을 때 보았던 어느 농부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그 가족과 함께 슬픔을 나눈 경험에서, 그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죽음을 보여주고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라고 죽음을 모르고 자라진 않는다. 언젠가는 그들도 죽음을 알게 된다. 숨긴다고 될 일도 아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 아무래도 이건, 의사에게 주로 해당하는 말이 되겠지만, 나는 그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병원(의사)은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의사는 절대자다. 대부분의 환자는 그 절대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절대 복종하는 신자가 돼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엔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꼭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환자 나름의 스타일이라구 해 두자). 나는 이런 관계가 익숙하지도 달갑지도 않다. 그렇지 않은 의사도 간혹 있다. 그러나 대개 의사들은 친절하다기보다 권위적이고, 환자를 향한 배려가 깊지 않다, 고 느끼게 만든다.
“그들은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을 배웠지만 ‘삶’의 정의에 관한 토론이나 훈련은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기계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환자의 표정보다는 기계의 수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p. 37~38)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환자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환자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 그런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의사가 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건 이 싸움에서 결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환자와 가족, 의사가 함께 하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환자들은 의사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크게 의존하게 마련이다.”(p. 51~52)
“환자에게 힘주어 손을 한번 잡는 것,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눕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말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다.”(p. 187)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고통을 고스란히 전이 받을 이유는 없다. 그들도 죽음을 이야기하고, 다른 것들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들에겐 분명 살아가야 할 일상이 있다.
“환자의 가족들이 얘기하고, 울고, 필요하면 소리를 지를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의 가족들은 환자의 곁을 지켜주되 감정을 나누고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들은 죽음과 관련하여 환자 본인보다 긴 시간을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쁜 소식을 듣는 그 순간부터 환자가 세상을 떠난 뒤 한 달 동안 도움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p. 289)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이들의 마음에 한 발짝이라도 들어가는 일.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마음과 함께 호흡하는 것. 그들은 아직 생을 누리고 있는, 우리와 같은 하늘아래 숨을 쉬는 사람임을.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일. 그런 작은 일이, 그들에겐 그것이, 삶의 햇살이고 의미이며 희망이 될 수도 있다.
고로, 이런 것들을 쌓다보니, 나는 이 말에 완전, 동의한다.
그리하여,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던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리는 별소년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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