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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노래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사랑하며 살았고 후회 없이 노래하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2.19 ~ 1963.10.11)


국민가수.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타이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조용필 정도의 가수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입니다.
어디 프랑스라고, 국민가수 없겠습니까. 여기, 이 사람이 그 주인공입니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그런 피아프의 생애를 그린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라비앙 로즈>도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배우 마리옹 코티아르가 피아프를 열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죠.

피아프의 삶은 여러모로 극적이었습니다.
천재예술가가 짊어진 굴레가 그런 것처럼, 그 역시 굴곡진 삶을 살았는데요.
태어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아요. 
산기가 있어 자선병원으로 가던 어머니가 파리의 노동자 거리인 '벨베이르' 길 한복판에서 그를 낳았습니다. 경관이 그를 받았고, 빈민촌의 주민들이 구경하는 대낮이었습니다.
그때는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시련은 그러나 곧 시작됩니다. 거리의 가수였던 어머니가 그를 버렸습니다.
외할머니, 할머니 손을 거쳐, 서커스 단의 곡예사었던 아버지와의 떠돌이 생활.
그러나 결국은 매춘부 소굴에 버려져야 했던 아픔.
다만 유일한 위안과 재능은 타고난 목소리였습니다.
오직 그 목소리와 14세에 만난 친구 모르몬이 외로운 그를 구원했지요.
노래를 부르면서 모르몬과 서로 의지하며 살던 그는 16세에 배달사환이었던 루이 듀퐁과 사랑에 빠져 이듬해 딸 마르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 2살 무렵 수막염으로 죽고 마는 비극.
다음 남자친구는 하필 또 포주였어요.
몸을 팔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러 번 돈을 그에게 상납해야 했던 소녀의 마음,
어때요, 헤아려지나요?

피아프에겐 역시 노래 밖에 없는 듯 보였지요.
에뜨또 광장 옆 트르와이용 거리에서 노래하던 18세의 그를 눈여겨 본 '쟈니스 카바레'의 지배인 루이 르플레 덕에 처음 무대에 올랐어요.
그것이 바로 프랑스의 국민가수, 피아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지요.
그때 루이가 그에게 준 새로운 이름이 '라 모메 피아프'(La Mome Piaf).
147cm에 불과한 그의 키를 고려해 파리 방언으로 '작은 참새' 혹은 '아기 참새'를 의미하는 이름을 붙여준 거죠. 루이는 피아프에게 기본 무대 매너를 가르치고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 드레스를 입도록 조언하는 등 피아프의 음악적 아버지 역할을 했어요.
그러나 루이가 폭력조직에 살해당했고, 시인이자 소설가, 작사가, 가수인 레이몽 아소가 피아프의 재기를 도우면서 새롭게 이름이 내세운 것이 '에디트 피아프'였습니다.

여하튼 쟈니스에서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피아프는 파리 전체에 화제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솟아오른 인기와 부에, 당연히 따르는 것은 애정사.
그의 숱한 애정사 가운데 이브 몽탕과의 연애도 한페이지를 장식합니다.
연하인 이브 몽탕을 발굴해 키워주고 직접 데뷔까지 시키는 헌신적인 애정을 쏟았지만,
(몽탕과의 사랑이 빚어낸 곡이 그 유명한 '라비앙 로즈'(La Vie En Rose, 장밋빛 인생)'입니다) 몽탕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연인을 찾아 갔지요.

피아프에게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어요.
무엇보다 권투선수이자 미들급 세계챔피언이었던 막셀 세르당과의 사랑은 애절하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의 세르당이었지만, 끌림과 매혹을 저지할 순 없었죠.
미국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세르당이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잠시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기간 주고받은 편지는 책으로 나왔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 사랑에도 비극이 닥칩니다.
1949년 미국에서 시합이 잡힌 세르당을 빨리 자신의 곁에 오라고 재촉한 피아프의 부탁이 화근이었습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르당은 세상을, 피아프 곁을 떠나고야 맙니다. 
그렇게 떠난 연인 세르당을 위해 피아프가 가사를 쓰고 부른 것이 '사랑의 찬가'이고요,
이 사랑을 다룬 것이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에디프 피아프의 사랑>(Edith Et Marcel, 1983)이었지요. 세르당 역을 그의 친아들이자 복서인 막셀 세르당 주니어가 맡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어진 연애사와 두 번의 결혼이 있었는데요,
그 와중에도 음악 뿐 아니라 술, 마약, 자살미수, 교통사고 등이 함께 했고,
영양실조, 모르핀 중독, 결핵, 간염, 관절염, 암 등 수십 가지 질병도 피아프를 따랐습니다.
1962년 21살 연하의 데오 사라포와 결혼했지만,
소화기 계통의 출혈이 심해 요양소 생활을 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주던 사람은 사라포였다는군요.

타고난 목소리에 피할 수 없는 삶의 비극이 삼투하면서 애끓는 노래를 잉태했던 국민가수,
피아프는 사실 당최 종잡기 힘든 이였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보다 새로운 연인이 더 좋다며, 자신이 어릴 적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버렸고,
미래의 사랑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한다며 전쟁의 참상을 외면했으며,
노래로도 어쩔 수 없었던 비극을 잊으려고 끝맺지 못할 뜨개질을 하던.
무대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객을 압도했으나,
무대 뒤에서는 외로움과 비극으로 점철된 발걸음으로 완벽한 사랑을 찾아 헤맸던 사람.
오죽하면, 그는 "나는 나 자신을 망치고자 하는 불가항력적인 욕망을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을까.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지은이, 실뱅 레네는 피아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초라한 검은 옷을 입은 자그마한 여자, 가녀린 어깨 위에 무거운 듯한 머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깊은 눈길, 누군가를 껴안으려는 듯 벌린 두 팔."


그렇다고 피아프를 동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는 늘 사랑하면서 살았고, 후회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샹송의 여왕, 신이 내린 목소리, 불멸의 프랑스 목소리라는 타이틀이 그의 음악적 성취를 대변한다면,
그를 파산에서 건져낸 1961년 올림피아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했고,
<파니 핑크>의 메인 테마이자, <몽상가들>에서 엔딩을 장식한 이 노래,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는 그의 삶을 요약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그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인, 에디트 피아프도 10월에 눈 감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에서 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그 계절에 말이에요.

(※ 참고자료 :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실뱅 레네 지음 / 신이현 역 / 이마고 펴냄), 위키백과,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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