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공명한 아프리카의 목소리, 미리엄 마케바(Miriam Makeba)
(1932.3.4~2008.11.9)
2008년 11월, 아프리카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마마 아프리카'로 불리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수 미리엄 마케바.
향년 76세였습니다.
어떤 가수는 무대에서 노래 부르다가 죽는 것이 가장 영광이라고 했다지만,
그는 정말 그런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에서 열린 한 자선공연.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열창한 마지막 순서를 마친 직후 쓰러졌어요.
앵콜을 외치는 함성이 거듭 울려 퍼졌지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부터 그를 구해낼 순 없었습니다.
이 공연은 저서 『고모라(Gomorra)』 때문에 마피아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는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신변 보호 촉구를 위해 열린 것이었어요.
그는 끝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노래 부르다가 세상을 떴습니다.
그의 인생 역정은 한편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픈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백인 가정의 하녀 등으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1954년이 돼서야 본격적인 음악인생의 막을 열었습니다.
남아공의 인기밴드인 '맨해튼 브러더스(Manhattan Brothers)'의 여성보컬이 됐습니다. 발군의 가창력 덕분에 아프리카와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1959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축하파티에 초대돼 공연을 했고,
전미 투어 공연을 하면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디바로 등극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케바의 명성을 끌어올린 것은,
같은 해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철폐 다큐멘터리영화 <컴백 아프리카(Come Back, Africa)>에 출연하면부터였어요.
영화 <킹콩>의 뮤지컬 버전 출연으로 남아공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했지만,
그에게 더 절실한 것은 어이없는 차별정책에 대한 분노였나 봅니다.
남아공 정부는 이듬해 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여권을 말소한 것은 물론,
63년에는 그가 유엔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관련 증언을 하자 그의 국적을 없애고 음악 유통도 금지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떠돌이 신세가 됐습니다.
자신이 진행하던 남아공의 음악 프로그램에 나가지 못한 것은 약과였지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가도 못했고, 이후 30년 이상을 미국, 프랑스, 벨기에, 기니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마케바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칼립소의 전파자이자 서구 대중음악계에서 주목받은 뮤지션, 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작업한 앨범으로 1965년 그래미상을 수상했습니다.
1967년에는 '파타 파타(Pata Pata)'가 큰 히트를 기록하는 등 망명 중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나왔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그의 목소리도 계속 됐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옥중에서 反아파르트헤이드 투쟁을 벌였다면, 마케바는 음악을 통해 아파르트헤이드 반대를 호소했던 인물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명 중에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불운도 함께 했습니다.
총 5번에 걸쳐 결혼한 마케바는 1968년 미국에서 급진적인 공민권 활동을 펴던 블랙팬서(Black Panthers)의 지도자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와 3번째 결혼하면서 미국에서 큰 반발을 샀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건의 콘서트가 취소되고 계약이 파기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또 망명 중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던 그는 하나뿐인 딸 '본디'가 1985년에 36살의 나이로 숨졌을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홀로 장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자궁경부암을 앓기도 했고요.
마케바는 80년대 들어서는 조국의 문제에 좀더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1980년12월 남아공에 둘러싸인 독립국 레소토에서 콘서트를 개최했고,
80년대 말까지 조국의 실상을 알리면서 세계를 순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대 초반, 만델라의 석방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붕괴되면서 그의 망명도 끝났습니다.
만델라의 집권과 함께 자유를 되찾은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
"나는 내 뿌리의 음악을 지켰다. 음악으로 나는 아프리카의 목소리가 되고 이미지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말마따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아프리카를 대변하는 목소리였어요.
혹자는 "아프리카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청각적 기억"이라는 말로,
대신했을 정도였죠.
마케바는 음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 사람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을 결합해 세계에 이를 알리는 한편,
참여적인 민중음악을 생산해 사회운동 차원으로 확대시킨 공로까지.
그런 그가 떠나자 이런 애도의 목소리들이 울렸습니다.
"사랑하는 미리엄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의 음악은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대통령)
"마케바는 즐거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로 억압받는 수백만 남아공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전해줬다."(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제이컵 주마 총재)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음악,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음악에 있어 그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다".(세네갈 출신의 가수 유쑨두)
(※참고자료 : AFP, 한겨레, 한국대중음악연구소)
[위민넷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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