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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스승, 권정생!

5월15일. 스승의 날.
선생님을 생각하자니, 마침 떠오르는 건,
오는 17일, 세상에 작별을 고한지 3년이 되는 권정생 선생님.

내겐 몇몇 스승이 있는데, (불행히도 내 학교시절의 스승은 없다!)
정확하게는, 송구하지만 스승이라 생각하는 선생님들이 계신데,
권정생 선생님도 그렇다.
김규항 선생님과 윤구병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고,
역시 내가 스승이라 생각하는 그 분들도 스승으로 모시는,
 그러니까, 스승의 스승. 권정생 선생님.

3주기까지 나는 응원하기로 했다.
지금 계신 구름의 저편에선, 부디 22~23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계시길.
그 아가씨 얼굴 보고 싶구만. 선생님의 어린 애인, 어쩌면 사모님. 하하.

지난해, 이맘 때, 선생님 생가를 찾았다.
조현 한겨레 기자의 휴심여행을 스케치한다는 명목.

어머니, 아버지도 함께. 
나름 어버이날 선물이자,
더불어 선생님의 영성을 느껴보고자.

그리고, 다시 1년.
권정생 선생님을 생각한다.
그때 그 어떤 '울림'을 다시 끄집어내 본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참고로, 14~20일까지 선생님 추모기간이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그리 정했다.

합천 가회면 귀농촌, '벽오마을'에는 '강아지똥 학교'가 세워질거란다.
마을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그곳의 강아지똥 학교.
가보고 싶다. 아주 작게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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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 안녕하세요?”… 울림 품은 여행길에서 묻다
『울림』의 저자 조현 기자와 함께 한 휴심여행


5월17일,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신지 2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가볍게 권 선생을 떠올리면서, 응원했습니다. 부디 그곳에선, 건강한 25세의 몸으로 22세나 23세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꼭 하시라고. 작년에도 빌었던 것을 올해도 똑같이 되뇌었습니다. 내년 3주기까지 권 선생 기일엔 이 응원을 계속할 생각이에요.


아, 권정생 선생이 누구냐고요? 한겨레의 조현 종교전문기자(http://well.hani.co.kr)의 얘기를 들려드릴게요. “대표적인 동화작가시죠. 『강아지똥』 등 아이들은 잘 알 겁니다. 어른들도 물론 권 선생님 동화를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시골교회의 종지기를 하시면서 영성적인 내용을 담은 동화책을 많이 쓰셨어요. 또 우리 전통을 사랑하셨고요. 선생님은 이웃 농부, 할머니, 아낙 등 모두를 하나님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시골에서 농사짓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다시 태어나서 쓴 작품이 『부활』이었는데요, 권 선생님도 자연 속에서 생명과 하느님을 보신 거죠.”


『강아지똥』도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이 설명도. “강아지똥을 의인화한 작품입니다. 볼품없고 비탄에 빠진 강아지똥이, 자신이 민들레를 틔울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현대인은 어떤 위치에 있든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기대나 욕망을 충족하지 못해 화가 나 있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하는 비탄에도 빠지고. 그러나 강아지똥조차도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듯, 여러분도 이번 여행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이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행을 떠났습니다. 지난 9일, 안동을 향해, 권정생 선생의 삶을 그리기 위한 휴심여행을. 『울림』(조현 지음/시작 펴냄)의 저자, 조현 기자와 함께, 40여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울림』은 숨은, 곧 그닥 알려지지 않은 영성가들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권정생 선생이 제일 앞에 나옵니다. ‘동화를 남기고 간 가난한 종지기’라는 소제목으로.


이번 여행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자산가였지만,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시골의 촌부로서 살아간 그의 발자취를 헤아려보기 위한 자리였죠. 자, 한번 같이 떠나 보실까요. 


조현기자의 달리는 강의실


아침 7시30분, 서울역 부근에서 떠났어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조현 기자의 달리는 강의실이 열립니다. 역시 권 선생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선생의 삶은 범인들로선 상상하기 힘든 삶, 그 자체였어요. 속세의 어떤 명예조차도 거부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페이스로 살아가신 분이셨어요. 조 기자도 힘들게 선생님을 만나셨대요. “선생은 상태가 아주 좋을 때가 쌀 두가마니를 짊어진 것과 같다고 하셨어요. 평생 병고에 시달리셨는데, 어쩜 그리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신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권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직후인 46년 외갓집이 있는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워낙 가난해서 중학 진학을 못하고 부산으로 갔지요. 점원도 하고 나무와 고구마 장사 등을 했으나 몸을 너무 혹사한 탓에 폐결핵이 그만 몸에 달라붙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평생. 그 때문에 신장, 방광 등도 떼어내셨대요.


1968년에는 유일하게 의지했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동생과 사는데, 앓아누운 형 때문에 동생이 장가를 못가고 있다는 아버지의 얘기에 집을 떠나 걸인처럼 떠돌았습니다. 그렇게 3개월 만에 돌아오니 동생은 장가를 갔지만, 아버지는 몸져누워계셨고, 얼마 뒤 돌아가셨습니다. 결핵균은 더욱 그를 공격했고, 의사는 2년 밖에 못살 것이라고 했다지요. 그러나 그는 죽음을 품에 품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교회 종지기 생활을 했습니다. 


권 선생을 만난 조 기자의 회상도 계속 됩니다. “제가 간 날도, 잠깐 밖에 나가고 안 계실 때였어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 봤는데 1~2평 정도의 방에 책이 쌓여있고 누울 공간밖에 없더라고요. 드시는 약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니 눈물을 쏟아졌어요. 이런 절망 같은 상황에서도 <강아지 똥>과 같은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다니.”


선생은 마음만 먹었다면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다른 사람을 부리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쓴 책의 인세는 충분하거든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세를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그 모든 인세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유언장에서는 그런 그의 면모와 유머를 엿볼 수 있어요.(주. 권 선생의 유언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권 선생은 참으로 수줍은 사람이었답니다. “저하고 얘기할 때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시고 수줍어하시더라고요. 그래도 할 말씀은 다 하세요. 한 예로 도법스님이 걸어서 전국을 돌아다니셨어요. 하루에 15km씩 6000km를. 그런 도법스님이 권 선생을 만나셨는데, 권 선생이 그러세요. ‘그렇게 걸어 다니면 누가 일 합니까. 저는 줄기세포 만든다는 황우석 교수보다 농민 한 명 한 명이 더 소중하다고 봅니다. 다소곳이 시골에 와서 일하면 돼요. 스님 혼자 걸으시고 다른 사람들은 일하게 하세요.’”


그런 분이셨어요.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병약한 몸이었지만, 그것으로 삶을 밀고 나간 분. 조 기자는 그런 권 선생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여행의 핵심을 얘기합니다. “우리 마음을 쉬는, 마음을 바라보는 여행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식물보다 독특한 것이 있다면 마음인데, 그 마음이 있어서 영성과 자비심,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굶어죽으면서도 봉사, 희생할 수 있는 것은 마음 때문입니다. 권 선생 오두막에 가서도 그 마음을 잘 헤아려 보세요.”


그만큼 오늘의 휴심여행은 마음과 정신의 수양을 쌓기엔 딱 좋은 코스였습니다. 권 선생을 비롯, 퇴계 이황의 정신이 집약된 도산서원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있는 봉정사까지.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지요. 1000원권 지폐의 주인공인 이황 선생은 은둔형 천재였지요. 공직에 나가 이름을 떨치기보다, 자신이 있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자 자신이 중심이라고 여기고, 학문을 닦은 분이죠.


그리고 봉정사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을 촬영하고 영국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다녀가면서 ‘조각상’ 같다고 감탄까지 했다지요. 버스 안에서 그런 안동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에 평안이 깃듭니다.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지요. 참, 오늘의 여정이 재미있는 것이 기독교(권정생 선생)-유교(퇴계 이황)-불교(봉정사)의 3개 종교를 아우른다는 것이었어요. 뭔가, 영성이 느껴질 법 하죠? 하하.


조탑리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권정생 선생


그렇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이,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위치한 일직교회. 권정생 선생이 종지기를 하셨던 바로 그곳입니다. 교회 종탑이 보이고 그 옆의 컨테이너 건물이 있습니다. 1968년부터 82년까지 살면서 <강아지 똥>을 집필한 장소랍니다. 이 교회 이창식 목사는 <강아지 똥>이 주일학교를 통해 권 선생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동화 중의 하나라고 알려줍니다. 이 목사는 교회에 부임해서 권 선생이 돌아가시기까지 4년을 함께 보냈는데, 정말 좋은 분을 만났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일직교회 이창식 목사의 설명


이 목사의 권 선생에 대한 회고담이 이어집니다. “여기 계실 때도 폐결핵 환자셨어요. 당시만 해도 폐결핵 환자한테는 사람들이 접근도 안 할 때인데, 권 선생한테는 달랐어요. 사람들이 환자인 줄 거의 못 느끼고, 권 선생 방에 들어가 같이 먹고 잠자고 그랬어요. 그만큼 병을 뛰어넘을 정도로 인품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전염 우려 때문에 권 선생 자신이 사람들에게 접근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정도로 그에겐 특별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은, 가장 보통의 평범함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목사는 또 말합니다. “중병에 걸리면 거기에 짓눌려 살곤 하는데, 권 선생은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함을 누리셨어요. 그래서 위대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종환 시인도 2002년 권 선생에 대해 ‘작가보다는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라고도 했어요. 정말 안티가 없었어요.”


아까도 언급했지만, 권 선생은 자산가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세 수입 등으로 12억원이 있었답니다. 우와~ 하지만 자신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살면서, 그는 죽기 전에 마을과 친척들에게 2억원을 나눠주고 나머지는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사용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이런 그의 뜻을 받드는 일을 하고 있고요.

교회 종탑 아래 권정생 선생 말씀


교회 종탑 옆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권정생-” 권 선생이 하신 말씀을 이 목사가 쓴 것이랍니다. 소외받고 아픈 이와 함께 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장갑도 끼지 않고 종을 쳤다는 사람, 그 사람, 권정생입니다.


구도자의 체취를 품은 오두막


그리고 권 선생이 말년까지 25년을 살았던 오두막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마을 골목의 돌담길에서도 한동안 들어가야 나오는 조그마한 오두막.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뿌리를 내린 조탑리에서 그는 12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이 흙으로 된 오두막을 지었답니다. 말끔하게 정리된 듯한 모습은 후배작가들이 그의 사후에 청소한 것이라네요.

권정생 선생 오두막


조 기자의 회고입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수풀이 우거지고,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신문과 책들이 쌓여 있었어요. 권 선생은 자연이나 동물과 격의 없는, 굉장히 독특한 삶을 사셨어요. 친한 친구와 함께 방에 있는데, 닭이 갑자기 들어와서 헤집고 다니자 그 친구가 쫓아내려고 하니까, 닭이 권 선생의 품안에 딱 안겼던 일화도 있었고요. 한겨울 추위를 피해 이불 안으로 들어온 생쥐도 내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셨어요.”

문 위에 씌어 있는 권정생 선생의 이름


권 선생은 그렇게 자연에 가깝고자 한 사람입니다. 한 달에 쓰는 돈도 채 5만원이 되지 않았다고 하고요. 이웃과도 친하게 지내면서도 이웃들은 그가 그렇게 유명한 작가인지도 몰랐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집 팔아 돈이나 쓰고 가라고 이웃들은 권 선생께 거듭 권했다지요. 빙그레 웃음만 지으셨을 양반의 모습이 떠올라 왠지 짠해졌어요.
 

누군가가 두고 간 카네이션


아, 그런데 어제 어버이날(5월8일)을 맞아 누군가가 권 선생 오두막 앞에 카네이션을 갖다 놓았네요. 비록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권 선생은 누군가에겐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나 봅니다. 주인 없이 집 앞에 덩그러니 놓인 그 카네이션을 보자니, 괜히 눈시울이 찡합니다.

권정생 선생에 대해 회고하시는 동네 할머니


그리고선 권 선생이 세상을 뜨기 전, 이현주 목사, 조 기자 등이 모여 묵상했던 마을 어귀 정자나무를 찾아가는 길, 마을 할머니께 여쭤봅니다. 권정생 선생에 대해. 할머니들은 하나 같이 “좋은 양반이에요. 모든 것이 착해요”라는 말을 들려줍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는 그가 죽고 나서야 알았답니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을 보고. 조 기자가 한마디 거든다. “전혀 유명한 티를 안내고 소박하게 사셔서 마을 사람들이 몰랐던 거죠. 원래 유명한 사람들은 이웃들로부터 좋은 소리 못 듣는데...(웃음)”
 

정자나무 아래 묵상의 시간을 갖기 전


그리고 조산정. 권 선생의 영성이 깃든 정자나무 아래, 우리는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람은 시원했고, 마음은 한 없이 고요해졌습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시간. 번잡한 도시를 떠나 영성을 만나는 이 시간. 따로 ‘OO교회’라는 이름이나 간판을 붙일 것도 없이 까치네집이라거나 심청이네집, 망이네집과 같은 걸로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스님 모시고 부처님 말씀도 듣고, 훈장님께 공자맹자 말씀을 권하고, 단옷날에 돼지와 막걸리를 먹으면서 춤추고 노는 그런 교회를 원했던 그 사람, 권정생이었습니다.


묻고 싶어졌어요. 저 구름의 저편에서 그런 교회를 만들어서 막걸리 한잔 하고 계신 거죠?


퇴계 이황 선생의 흔적을 찾아
 

안동 명물 헛제삿밥


그렇게 영성을 흡수하다보니 어느덧 점심시간. 안동의 명물이라는 헛제삿밥을 먹었어요. 제상에 올린 나물과 탕채를 간장에 비벼먹는 음식이에요. 옛 선비들이 밤늦게 글을 읽다 보면 배는 고픈데 음식을 만들면 냄새가 이웃에 풍겨 폐를 끼치게 돼서, 실제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며 이웃 사람들을 모아 함께 나눠 먹은 음식이 헛제삿밥의 유래라고 합니다. 맛은 깔끔하고 담백하고 좋아요.


점심을 먹은 뒤, 달빛이 물에 비치는 다리라는 월령교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았어요. 강과 어우러진 목조 다리는 때론 바람에 흔들리면서 상쾌한 기분을 불러일으켰어요.
 

도산서원 가는 길


오후 여정의 시작은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입니다. 사적 제170호로 퇴계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선서당을 품은 곳입니다. 얘기를 듣자하니, 그는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과 인격을 닦는데 더 힘을 기울였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국회의원 뱃지, 장관 자리 한번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이는 광경을 익숙하게 보아온 우리로서는 그의 행적이 다소 의아하게도 보입니다. 조 기자의 설명이 있었지요. “현대 도시인들의 경쟁위주 사고방식에서 보면 과소평가할 수 있지만, 그는 자기분수를 알고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유학자였지만, 아들이 죽고 홀로 남은 며느리를 개가시킬 정도로 열린 사람이기도 했고요.”

도산서원 현판


도산서원


도산서원 광명실


도산서원 곳곳에는 퇴계 선생이 무척 좋아하고 아꼈다는 매화가 아주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요.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을 비롯, 제자들의 기숙사였던 농운정사, 퇴계 선생이 친필로 적은 현판을 가진 서고인 광명실 등 퇴계 선생의 흔적을 엿봤어요.


봉정사에서는 자비를 품고

봉정사


이어 이동한 곳은 천등산 봉정사였습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의 제자인 대덕이 창건한 절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국보15호인 극락전을 품고 있죠. 절 내부에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기도 했는데요, 절은 도시의 거대 절들만큼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고 평화로웠어요.
 

봉정사


봉정사에 대한 설명과 해설을 듣고 있다


대웅전에는 후불벽화가 있는데, 지난 1997년 탱화를 보수할 때 발견됐고, 그 전에 가장 앞선 후불벽화로 평가받던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것보다 40여 년이나 앞선다네요. 그렇게 산사 곳곳을 누비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절에 모신 부처의 자비만큼 세상이 자비로워지길, 내 마음에서도 소박하지만 자비가 둥지를 트길.


그렇게 누빈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의 여정은 마무리됐습니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 역시나 안동의 명물인 안동찜닭으로 주린 배를 채웠어요. 돌아오는 길, 조 기자를 비롯한 몇몇 여행객의 소회가 이어졌어요.


조현 기자가 말합니다. “한국은 종교적으로 독특한 나라에요. 대개 다른 나라는 태어나는 순간, 종교가 정해지고 선택권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죠. 유교도 조선왕조 500년이 끝나고 종교 자체로는 사라지고 문화만 남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민중들과 호흡하지 않으면 소멸했어요. 종교는 자신과 반대되는 사상과 만나면 핵융합이 일어나 정신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상재, 조만식 선생 등도 정신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거예요. 요즘 근본주의적․성장주의적 기독교가 판을 쳐서 그렇지, 초기에 그런 분들이 우리나라 기독교 틀을 만드신 겁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그 지독한 폭력. 이 같은 근본주의 포교가 낯설지 않은 현실. 이번 휴심여행은 그런 면에서 진짜 영성을 알려주지 않았나 싶어요. 권정생 선생이 보여준 실천적 영성의 길이 바로 그것이었죠. 권 선생을 매우 사모한다는 누군가는 “방을 직접 봐서 매우 좋았고 감사한다”고 했고, 일주일 전 사직서를 썼지만 아직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민 중이라는 어떤 이는 “『강아지똥』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피우는 그 과정들처럼 나도 아직은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희망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마음 한 구석에 작지만 큰 ‘울림’ 하나씩 품고 돌아왔습니다. 이 울림이 각자의 생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흔들어놓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 내 마음의 울림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이 작은 울림이 먼 훗날 언젠가, 민들레꽃으로 승화하는 강아지똥일지 누가 알겠어요. 


참, 혹시 아이가 있다면, 『강아지똥』도 좋고, 권정생 선생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는 『강아지똥 할아버지 : 권정생 이야기』도 좋을 것 같네요. 물론 어른들에게도 당근, 좋습니다. 더구나 아직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가득한 사람이라면.



※ 아래, 권정생 선생님의 유언장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적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세 때 22세나 23세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5월1일 쓴 사람 권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