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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보다 더 극복하고 싶었던 세상

스윙보이 2008. 7. 2. 18:39
장애보다 더 극복하고 싶었던 세상

[세상을 이끄는 여성] ① 헬렌 켈러 (1880.06.27~1968.06.01)

때론 장애를 극복했다는 사실이, 다른 더 큰 진실을 압도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승리’만 부각될 뿐, 온전한 생은 거세된 경우죠. 당사자가 그것을 조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특정집단의 필요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헬렌 켈러(본명. 헬렌 애덤스 켈러, Helen Adams Keller)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헬렌 켈러’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맞습니다. ‘인간승리’의 대명사. 많은 사람들이 그래요. 교과서, 위인전, 많은 대중매체 속의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장애를 이겨낸 위대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 수사도 분명 맞습니다. 그는 생후 19개월에 앓은 열병 때문에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7살에 만난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장애를 극복합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헬렌 켈러와 앤 샐리번 선생의 49년 우정’입니다. 헬렌 켈러는 16세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5개국어를 구사했으며, 미국 최초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승리’ 맞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헬렌 켈러는 어땠을까요. 88세까지 살았는데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헬렌 켈러의 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여기서 더 큰 진실이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그는 열정적으로 사회와 접점을 찾습니다. 설리반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과 우정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헬렌 켈러를 형성했다면, 이제는 자신만의 사고와 행동으로 생을 꾸립니다. 그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세계와 사회를 고민했고, 자신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냈습니다. 대학시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진 그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펼쳤습니다. 또 아동노동과 인종차별에 반대했으며 사형 폐지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미국 사회당에 입당했고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글을 발표하고 방송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었죠.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전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라고 1차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자, 그는 이렇게 비판합니다.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의 활동이 마뜩찮은 일부 주류언론에서 ‘배후세력이 있다’ ‘누군가에게 조정당하고 있다’는 보도를 했으나, 그는 당당히 밝힙니다. “위선적인 동정은 거절한다. (나를) 이용한 것은 자본주의 언론”이라고. 그는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저널리스트 존 리드를 비롯해 당대의 다양한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사회활동을 펼쳤습니다. 1940년대에는 스페인 공화주의자 석방운동을 펼쳤고,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의 석방운동에도 동참했습니다. 인간승리의 상징이자 존경받는 활동가인 헬렌 켈러의 활동에 대해 미국 정부는 탐탁치 않아 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미국연방수사국(FBI)이 그를 감시·사찰한 보고서에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 정당당원”이라고 해놨을까요.

이런 헬렌 켈러를 ‘장애극복’의 테두리에서만 보는 것은, 극히 일부만을 보는 것이죠. 그는 어떤 배후나 누군가의 조정이 아닌, 자신만의 의지로 사회의 변화를 위해 헌신한 투사였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욱 심각한 장애와 결함을 가진 ‘무쓸모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프로그램에 나간 그에게 묻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답합니다. “쓸모보다 목숨이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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