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라, 직딩아~

이런 회사 어디 없소? 놀이와 일이 구분되지 않는!

스윙보이 2007. 6. 4. 00:24
이른바 '삼성맨'의 사직서를 보고 나서 다시 회사를 생각한다.

나는 '직업'보다는 '직장'을 몇차례 옮겼다.

틈틈히 바뀌다보니 명함도 자주 바뀌었다. 대개의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또 직장 옮겼냐? 이번엔 어디냐" (사실 나는 이런저런 묻지 않고 묵묵히 "잘 옮겼다"는 말한마디로 내 심정을 알아주는 몇몇 속깊은 친구들이 그래서 좋다)

여기서도 그렇지만 구구절절 연유야 설명을 하기가 때론 난감하다. 이직을 단 하나의 이유를 들어 설명하기는 당최 어렵다. 사람살이가 그리 단순하겠나. 쯥.

본디 회사(조직)와 맞지 않는 내 성정도 있겠지만, (내가 거친) 회사들 대부분은 그리 온당치 못했다.('조직 부적응자'라는 일갈도 인정한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모든 회사(조직)는 불합리하다'는데 나는 방점을 둔다. (누군가는 자기합리화라 일컫겠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느낀 것들도 많지만, 오늘은 하나만 긁적이련다.

이른바 '삼성맨'이 언급한 것 중에 내 맘에 와닿은 것 하나. 니부어, 막스베버, 대리인 이론 등도 다 좋지만, 그의 사직서에 언급된 아이스크림 가게들의 사례. 한국 분당에 있는 베스킨 라빈스와 일본의 다른 아이스크림 체인에 일하는 종업원들간의 표정이 극과 극으로 제시됐다.

그는 음식점에 가면 인테리어나 메뉴보다 종업원들의 분위기를 먼저 본다고 했다.

그것이 결국 퍼포먼스의 척도가 될 수 있다고 했다.(그가 쓴 사례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완전 공감한다.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를 외치지만, 그 이전에 반드시 선행돼야 할 것이 직원(종업원) 만족이다.  

직원들이 움직이지 않고 즐겁지 않은데 고객이 어떻게 만족하고 즐겁겠는가. 퍼포먼스 나오려면 직원들한테 우선 잘해주는 것이 기본 아닌가. 그런데 왜왜!!! 회사는 직원을 흡혈귀처럼 빨아먹으려고만 할까. 그들을 춤추게 만들지는 않을까.

그러면서도 성과니 고객만족이니 앵무새처럼 지저귀게 만든다. 아무리 밥벌이의 지겨움이라지만, 나는 그것이 때론 참을 수가 없다. 그들의 천박하고 무책임한 직원 부려먹기 행태가.

'좋은 직장'에 대한 몇몇 사례들이 있다. 그것들을 보면서 나는 팍팍 부럽다. 특히 그 사례들이 주로 외국에서만 나와 있어서 안타깝다.

직장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미덕이 되고만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는 아직 꿈꾼다. 양립할 수 없다, 고 생각되는 이 가치들의 화학적 결합을. 놀이와 일이 구분되지 않는. 유연함과 자유로움이 혈관 속을 흐르는 회사.
 
'사람들은 놀기위해 태어났다'는 명제를 나는 믿는다. 즉, '호모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죽을만큼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나는 '짜증 지대로다'를 외친다. 더구나 '열심히 일하라'는 표어에 숨은 자본의 흉악한 이데올로기. 'Born to Play'인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회사의 기제.   

놀이와 일이 분리되지 않는 일터를 꿈꾸며 나는 한때 사업을 구상하고 직접 했다. 물론 그 동기만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이왕 하게 된 거, 정말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이 몽상(?)을 꽃피우기도 전에 꺾인 것이 문제였긴 하지만.^^;;

그런데 '회사는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거나 '기업의 설립 목적은 이윤 극대화'라는 절대 명제. 과연 그런가. 당신은 의심한 적 없는가.

'이윤'이란 단위 뒤에 똬리를 튼 무한 성장의 욕망이 나는 무섭다. 이는 또 조직원들을 미치게 만든다. 혹은 거기에 완전 복무하게 만든다. 군대 '복무신조'보다 회사 '복무신조'가 더 야멸치고 얍삽하다. 군대야 외우게 만드는 정도지만, 회사는 이를 직원들의 DNA에 박히게끔 조작한다. 무서운 놈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은 정말 솔깃하다. 이 팍팍하고 냉정한 세상에 이런 바이러스가 널리 유포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사우스 마운틴 이야기>>

☞ "아,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

이 기사에서 인상적인 구절들은 이랬다.
여러 사람이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던가? 함께 노를 젓는 사공이 많아지면서, 우리의 속담과는 달리, 사우스 마운틴도 훨씬 더 역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회사의 성장에 분기점이 될 만한 일감이 들어왔다. 고객은 거대한 얼음 바위가 있는 언덕 꼭대기에 경관이 좋은 집을 짓고 싶어 했다. 언덕의 자연을 훼손할 게 뻔했다. 사우스 마운틴은 고민에 빠졌다.
 
존 에이브램스 혼자였다면 현실과 타협했을 것이다. 에이브램스는 동료들과 함께 해당 부지로 올라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침묵은 금방 깨졌다. 한 동료가 "포기합시다"라고 말한 순간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그 일감을 포기한 사우스 마운틴은 회사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고민에 들어갔다.
 
"이 예기치 않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성장'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객의 요구에 맞추는 수동적인 작업 방식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고 이윤과 손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우스 마운틴은 '성장'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기로 했다. 직원들과의 오랜 토론 끝에 무한 성장이라는 신화를 거부하는 데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성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성장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 자체를 위한 무한한 성장('암세포의 논리')은 거부한다. 우리는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장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규모를 확장하면서 우리가 지켜 온 가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 '집 사용설명서' 주는 회사가 있대요

같은 회사에 대한 한겨레의 서평(사실 서평이라기보다는 이 '좋은' 회사에 대한 취재기사 같다)도 재미있다. 특히 한겨레가 붙인 '남산건설', 이름 한번 맛깔난다.^.^

'양적 성장'을 거부하고 '달팽이 속도'를 선택한 이들. 놀이와 일의 '진정한' 결합은 어쩌면 '과도한' 욕심을 버리는 지점부터 시작할런지도 모른다. 끝없는 자기팽창과 자기증식을 꾀하는 자본에 대한 반발. 그것이 소박하더라도 말이다.

역시 인상적인 구절.
매출이 늘던 어느 날. 섬 바깥으로 진출해 더 큰 돈을 벌 것인가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인다. 결과는? 큰 돈벌이가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판단하고 섬 안의 일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들은 성장 자체를 위한 무한 성장, 즉 ‘암세포의 논리’를 거부한다.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성장은 ‘달팽이 속도’. 작은 규모를 유지하면서 내부에서 많은 일을 하는 방식 아래 교육을 장려하고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준다.

건축주와 계약서는 달랑 3쪽. 계약은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의미있는 만남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25년간 400만달러어치의 건축 일을 하는 동안 소송이 한 차례도 없었다. 회사의 작업장과 사무실은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고 집에서처럼 티타임 중에 회사에서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이 이뤄진다. 가치관이 비슷하고 그에 부합하게 삶으로 아무도 부자가 되지 못했지만 일을 즐기며 마음 편하게 산다. “‘어느 누구’도 부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적절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은이는 고백한다.


나는 "회사의 작업장과 사무실은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고 집에서처럼 티타임 중에 회사에서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이 이뤄진다"는 '사우스 마운틴'의 풍경과 비슷한 한국의 한 회사를 안다.(자세히는 아니지만) 우연찮게도 이곳도 건축 일을 한다.

몇차례 포럼 참석을 위해 이곳에 갔는데 여기 가는 날은 이방인인 나도 참으로 즐겁다. 그리고 부럽다. 황두진 건축사무소. 인문학과 건축의 만남. 참으로 부러운 조합이다. 사실 자꾸 커가려고만, 몸집을 불리려는 욕망이 부대끼는 그런 회사는 사실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더 솔직히는 '짱'난다.

그래서 나도 '남산건설'의 그런 구조 속에서 있고 싶다. 아무도 부자가 되지 못했지만 일을 즐기며 마음 편하게. 어느 누구도 부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적절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불편하고 억압적인 자본의 구속으로부터 탈피하기.

'켄 로치'감독 의 이야기와 일맥 상통한다.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다시 돌아와 '남산건설'에 대한 기사의 방점.  
더불어 사원의 처지에서 이런 회사가 부럽지 않은가. 강요되는 명퇴, 비정규직이라도 “싫음 말고” 똥배짱. 월요일 출근이 부담스런 회사가 아닌, 사람이 좋고, 더불어 일하는 게 즐거운 그런 회사 없을까. 조금 벌어 조금 쓰더라도 보람있는 일을 하는 지속성있는 회사. 희망은 갖자. 적어도 이런 책을 내는 출판사는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역시나 부러운 다른 회사 이야기.

픽사(PIXAR)다. <토이스토리> <니모를 찾아서> 등 맛깔나는 3D애니메이션을 선보였던 회사.

☞ 디지털로 꿈을 빚는 공장, 픽사를 찾아서

회사와 놀이가 결합된 풍경을 묘사한 것을 보면 정말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기사를 위해 어느정도의 과장도 섞여 있겠지만 조직원들의 회사 일상은 놀이와 크게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퀵보드는 이들의 일상을 빠르고 유연하며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자동차>의 한 애니메이터는 “지금까지의 작업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린 늘 염두에 둔다”고 픽사의 과감한 작업 분위기를 설명했다. 1층의 넓고 넓은 홀 한켠에는 오락실에서 볼 수 있는 오락기구와 당구대, 그외 몇 가지 보드게임 장비가 마련돼 있다. 골프장을 연상시키는 너른 뜰에는 배구장과 수영장, 축구장, 농구장이 있다. 아이팟 이어폰을 끼고 조깅을 하건, 1층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다 동료와 보드게임을 하건 픽사는 그 모두를 일로 여긴다. “이곳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자기 안에 채우고 싶어한다(People like lots of inputs). 놀이도 평상시 일의 한 부분이다.” 설명하던 넬슨 앞으로 누군가가 서커스의 한 장면처럼 외발자전거를 타고 달려든다. 이 ‘서커스 단원’ 역시 픽사의 애니메이터다.


이들이 창조적인 일을 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렇담 그런 것과 다소 멀어보이는 장치산업인 자동차를 만드는 이 회사는 어떤가.

☞ 맞춤형 복지의 페라리, 유럽 최고의 직장

기사는 이렇게 언급한다.
운동을 마친 알몬드는 조각가와 ‘예술적 대화’를 나눈다. 조각가와 만남은 회사가 마련한 ‘창의력 모임’(Creativity Club) 프로그램의 하나다. ‘창의력 모임’에는 음악가, 작가, 방송 디제이, 조각가, 화가,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을 초청해, 예술가들이 어떻게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창의력 모임에는 직급과 직종에 제한이 없다. 알몬드 같은 자동차 조립 라인의 말단 노동자부터 최고 임원까지 한 강의실에서 ‘공장 이야기’를 떠나 예술을 토론한다.


공장 이야기 말고 예술을 이야기하는 자동차 회사. 이런 건 한국에서 그저 꿈인가. 주야장천 공장 이야기에 지치는 한국의 노동자들이여. 직장인이여. 아흑...

나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보다는

열심히 노는 당신, 함께 즐기자~에 더 끌린다. 

이런말, 사실 그저 넋두리다.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도진 후천성출근기피증 혹은 후천성회사면역결핍증.

윗분들 하실 말씀이야 뻔하디 뻔하다.

"그럼 일을 즐겨. 놀이처럼" 혹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

나의 (혼자 속삭이는) 대답은 이렇다. "너나 즐기세요. 된장"


그러나 나는 아직 회사와 놀이의 어울림을 꿈꾼다. 내가 '남산건설'처럼 건축을 할 수는 없겠지만 하다못해 내 삶의 건축이라도 이렇게. (내 삶의) 건축사로서. '작은 회사의 즐거운 반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찌질한 인간의 즐거운 반란'까지는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반란과 반동을 꿈꾸는 하루.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프랑스 국적의 두 청년, '실벵 다르니'와 '마튜 르 루'가 지속가능한 발전의 선구자를 찾아 세계일주에 나서 대안 창출과 실천에 나선 80인을 찾아내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 : 지속가능한 발전의 진정한 선구자들>>을 낸 것처럼 한국 혹은 세계의 '사우스 마운틴'을 찾아보고 싶다.

두 청년이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를 출발점으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작업을 꿈꾸고 있다. 대안이면서 놀이를 꾀하는 회사(인)의 이야기.

아 근데, 내일 뭐 입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