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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여권신장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스윙보이
2008. 9. 23. 00:30
인류 최초의 여권신장론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4.27~1797.9.10)
지난 8월에 소개했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메리 셸리' 기억하시죠?
그에 대한 이야길 나누면서 잠깐 언급했었습니다.
메리 셸리가 페미니즘을 다룬,
19세기 남근중심의 시대에 저항한 요인 중 하나로 지목했던 것이 그의 어머니였죠.
열혈 여권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이번엔 그 울스턴크래프트를 얘기해보죠.
그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18세기 영국의 작가 겸 여권신장론자'입니다.
우선 첫째 방점은 18세기에 찍힙니다.
그때는 여성이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취급을 못 받던 시절이었어요.
태어났으나 여성에게 자체발광은 언감생심.
남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했던 것이 여성의 운명인양 취급됐던 시대.
울스턴크래프트는 그 엄혹한 시대에, "세상은 반은 여자"라며 여남평등을 부르짖었습니다.
한마디로 그건 미친(?) 짓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여성의 권리, 여권(女權)에 대한 자각을 외치다니.
물론 그런 주장에 우호적인 시대여건이 조성된 측면은 있어요.
앞서 왕과 귀족에게 침탈당한 인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던 18세기 유럽.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인권이 중요한 사상적 테마로 간주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당대의 '인권'이 온전한 인권이었느냐.
절래절래, 아니올시다. 인권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이론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지지를 받았으나, 그들이 내세운 인권은 '여성' 아닌 '남성'만 포함된 절름발이였습니다.
아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존재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당대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던 루소나 로크도 그랬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남성과 평등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더랬죠.
그러한 때,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은 한마디로 천지개벽할 일이었죠.
여성도 인간이며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여성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1792)의 발간.
인류 최초로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분석한 책이었죠.
그렇다고 당대, 남성들이 패권을 쥔 시대에 순순히 먹혀들어간 건 아니었습니다.
한 사회평론가는 책이 나오고, 그에 대해,
"패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고 원색적인 욕을 해대기도 했으니까요.
울스턴크래프트이 여성과 남성 간의 평등을 주장한 배경에는,
개인적인 경험도 한 몫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을 보기 위해 파리로 건너가 미국인 사회평론가 길버트 이무레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는 딸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화가 생기고 그는 버림받습니다. 자살까지 시도합니다.
남녀 간 불평등한 애정관계가 빚은 비극. 사랑했던 남녀의 헤어짐 이후 여성에게만 닥치는 비참함과 따가운 시선을 몸소 체험한 그는 여권 신장문제에 더욱 파고들어갑니다.
그러다 런던에서 급진주의자 모임의 일원에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사상가 윌리엄 고드윈과 가까워집니다.
고드윈은 울스턴크래프트의 상처를 달래줬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이뤄지는 사랑을 제안하게 되죠.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프로포즈였고, 망설이던 울스턴크래프트도 이를 받아들입니다.
둘은 결혼했지만, 여느 부부와 달랐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서로의 작업에 간섭하지 않는 결혼생활.
각자를 독립된 인격체이자 성인으로서 대접하고,
타인을 얽매거나 행동을 구속하지 않고 개인적 행동의 자유를 보장한.
와, 18세기에 이런 결혼생활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결혼 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런 말을 했다는군요.
"나는 여전히 독립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앞으로 내 자신의 생각과 원칙들을 발전시킬 것이고
남편이 거부한다고 하여도 그것들을 내 아이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 덕분인지, 그의 두 딸은 어머니의 유산을 잘 물려받았습니다.
비록 메리 셸리를 낳고서 열흘 만에 사망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각과 자유로운 사상은 두 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첫째 프랜시스는 시인 바이런의 애인이 돼 문학과 사상을 논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렸고,
둘째 셸리 역시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사랑하고 예술적 영감을 공유하면서 탈관습적인 삶을 살면서 작품 활동을 펼쳤습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깔보는 시대적 분위기 탓에 당대에 크게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또 19세기에는 그의 지성적인 면을 무시하고 사생활에 초점을 둔 전기 등이 활개쳤습니다.
20세기 여성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재평가됐습니다. 마거릿 조지의 『한 여성의 상황 One Woman's Situation』(1970), 엘리너 플렉스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ary Wollstonecraft』(1972), 클레어 토멀린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Mary Wollstonecraft』(1974) 등이 그를 다룬 책입니다.
(※ 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 주간한국)
☞ 19세기 남근중심에 저항한 작가, 메리 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