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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만든 결정적인 동반자, 예니 마르크스

스윙보이 2009. 1. 19. 17:20

가난과 질병,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빛난 카를 마르크스의 절반,
예니 마르크스(Jenny Marx)
(1814.2.12 ~ 1881.12.2)

마르크스를 만든 결정적인 동반자


"카를 마르크스의 절반이 여기 잠들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경제학자이고 혁명가로서 『자본론』의 저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부인이자 혁명동지인 '예니 마르크스'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절반. 카를의 명성과 업적에는 예니의 몫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표현이죠.
혹자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평생을 추방과 가난에 시달린 마르크스에게 힘의 원천은 예니 마르크스였다."

과연 예니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독일의 트리어의 명문귀족가에서 태어난 그는 진보의 기운을 받고 자랐습니다.
트리어는 당시 독일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곳이었으며,
한때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해 진보적인 이념을 퍼뜨려 놓은 곳이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죠. 예니가 지적이고 개방적인데다 낭만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었습니다.
카를과도 아버지 간의 친분 덕으로 어릴 적부터 소꼽친구로 자랐죠.
카를이 4살 어렸지만.

예니는 실로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빛나는 여성이었습니다.
'트리어 제일의 미인' '무도회의 여왕' 등이 그에게 붙은 별명이었다죠.
그를 묘사한 이런 문구도 있어요.
"녹색 눈빛, 갈색 머리, 달걀형 얼굴, 하얀 피부를 가진데다가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선녀나 다름없었다."
시인 하이네도 이렇게 감탄했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마력적이다."

예니 마르크스와 남편 카를 마르크스


그랬던 예니가,
돈 없고 당시 시시한 문필가에 불과했던 카를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집안끼리 친분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카를의 재능을 높이 사긴 했어도,
좀더 나은 상대를 바랐던 그의 집안에서는 '이 결혼, 반댈세'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을 꺾을 순 없었고,
비밀 약혼에 이어 1843년 두 사람은 결혼을 '감행'했습니다.
행복했겠죠? 그런 고난을 겪고 이룬 사랑이다 보니.
파리로 간 그들, 행복했나 봅니다. 첫 딸 예니도 낳았고.

그러나 그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들은 줄곧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카를은 '경제학'에는 능통했어도, '돈벌이'에는 무능했습니다.
예니는 남편이 건사할 수 없었던 집안을 대신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상적인 남편은 아녔지만,
예니는 남편의 일을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는 남편 곁에서 집필을 돕고, 용기를 북돋워 줬으며,
남편이 정립하는 혁명사상에 적극 동참하고 이해하는 동지로 자리했습니다.
두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된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이상을 놓치진 않았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덕목을 묻는 딸의 질문에 '소박'이라고 답할 정도로.

예니는 무엇보다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가 없었다면,
카를의 이론은 대중과 만나지 못한 채 사장됐을 거라고 여겨질 정도죠.
그의 지혜와 문학성이 악필이자 거친 카를의 원고를 대중이 알아보기 쉽게 바꾸고, 설명까지 곁들인 덕에 카를의 사상이 전파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카를 자신도, "예니의 의견이나 비판을 받지 않고는 어떤 원고도 인쇄에 돌리지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였죠.

하지만 불운이 예니 곁을 쉬이 떠나진 않았죠.
대부분은 정치적 박해를 받은 남편 때문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파리로, 파리에서 다시 브뤼셀과 런던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고,
어떨 때는 기본적 생필품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가난, 혹독했습니다. 셋째 딸 프란치스카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었는데,
관을 마련해 줄 돈조차 없었답니다.

일곱 자녀 중 네 명을 굶주림과 질병으로 잃은 예니였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먼저 보내야했던 어머니 예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빚쟁이들에게도 시달리는 등 참혹하고도 잔인한 생의 현장에서,
그는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물론 그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졸도, 발작, 질병, 도피 등에 대한 기록도 있다고 알려졌으니까요.
무엇보다 카를이 가정부 헬레네와 외도를 해서 아이까지 뒀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예니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고 하네요.

인류에는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지은 죄가 많은 카를은,
예니에게 이런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도 써서 보냈지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여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중 정말 아름다운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 하나하나의 곡선이, 심지어는 주름 하나하나까지 제 생명 중의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디서 당신과 같은 사람을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안녕, 내 달콤한 사랑.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당신과 아이들에게 키스를 보내며." (카를이 예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귀족가문의 영애였던 예니도 결국 끊임없이 닥치는 고난이 힘겨웠던지,
간암에 걸렸습니다.
카를은 그를 어린애처럼 돌보면서 쾌유를 기원했지만,
"카를, 나는 더 이상 기운이 없어요"라고 속삭이고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카를과 예니의 혁명동지 엥겔스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이제 마르크스의 삶도 끝났다!"
동지를 잃고 생을 지탱할 동력을 잃은 카를도 1년 3개월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만하면,
예니는 그렇게 세계를 뒤흔든 사상의 절반을 만든 여성이라는 사실, 아시겠죠?

(※참고자료 : 『예니 마르크스 또는 악마의 아내』(프랑스와즈 지루 지음/이정순 옮김/성현출판사 펴냄),『커플 : 클라시커 50』(바르바라 지히터만 지음/ 해냄 펴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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