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가을은 그렇더이다. 가을은 고독 혹은 외로움. 아니면 그리움. 시월의 마지막 날. 아무 것도 아닌 날이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날이 아닌 날. 사실, 쓸데 없는 장난이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만들어 놓은 '시월의 마지막 밤' 환상과, 리버 피닉스의 요절 혹은 영면이 새겨놓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박제된 아름다움.
가끔 그렇게 속절없이 날 울리는 게지. 악마적인 퇴폐와 고질적인 순수를 가졌던 한 청년.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사람.
매년 지겹지 않냐,고 누군가는 묻는데. 글쎄. 아직은 그닥 지겹진 않네. 사실 이렇게라도 꺼내지 않으면, 내가 이 세계의 야만 속에 속절없이 함몰될 것 같고, 감성이 노화하여 땅으로 하강한 낙엽처럼 바싹 으스러질 것 같아.
결국 지난해 긁어부스럼이 된 감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만, 어설픈 그리움의 연서로 기록되겠지만, 내 헛된 바람 중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리버 피닉스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리버 피닉스 따라하기> 이런 제목은 어떤가. 아니면, <누가 리버 피닉스에 약을 먹였지?> 혹은 <리버 따라 피닉스로 영면하다>.
흠. 별로 재미없지? 좀더 리버럴한 이야기와 형식이 필요해. <김수영, 리버 피닉스를 만나다> 이런 건 어때?
시인 김수영과 리버 피닉스는 물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수영은 1968년에 교통사고로 세상과 결별했고, 리버 피닉스는 1970년에 태어났다. 조금이라도 겹쳐지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리버 피닉스가 김수영의 환생이라고? 에이, 설마. 그건 나야, 나.^^;;;;;;;;;;;;;;;;;;
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마는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
다만, 김수영은 고독한 사람의 죽음이 어떠한지 안다. 1955년에 발표한 <나비의 무덤>을 보자. 김수영은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나비의 죽음과 다름을 말했다. 나비의 고운 지분은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고독한 사람이 남긴 지분은 어쩌면 영원히 살결 속에, 가슴 속에 박혀버릴지 모른다. 내가 아는, 리버 피닉스는 그렇게 고독한 사람이었다. 시월은 그렇게 제철이다. 쓸쓸함이 묻어날듯한 낙하의 계절. 나는, 리버 피닉스가 아프다.
죽었지만 죽어 소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꼭 어디선가, 나타나 '안녕, 잘 있었어?'라는 말을 건네줄 것만 같은 망자들.
리버 피닉스도 그렇다. 어쩌면 어딘가에 꽁꽁 숨어지내는 것은 아닐런지, 아니면 집시처럼 계속 어딘가를 떠돌거나, 진짜 자신의 별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대체,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리버 피닉스는 세상에 여전히 체취를 드리운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삼투하지 못한, 그래서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물론, 다시 시월의 마지막 날이 왔기 때문이겠지. 10월31일. 뜻 모를 이야기조차 남기지 않은 채 헤어졌기에, 나는, 우리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1993년 10월31일. 14주기. 아마도 차가운 새벽공기 맞으며 새처럼 파르라니 온 몸을 떨면서 차갑게 식어갔겠지. 마지막이 그러했을 것이라는 묘사도 있지만, 피닉스(Phoenix)의 영면이란 그런 것일까. 아라비아 사막에서 500~600년마다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올려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영조 ‘피닉스’. 유목민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리버가, 자본과 탐욕의 용광로,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견뎠겠는가. 결국 향나무를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을테고, 자진해서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영원히 박제돼 불사의 길을 택하는 것. 그렇게 이별이 아닌 다른 별에서 날갯짓하고 있는 거겠지.
리버가 향나무를 쌓아올렸다는 당시의 소식에, 슬프고 아팠어. 더구나 할로윈 파티를 핑계로 들썩거렸을 선셋대로, 절친했던 조니 뎁이 운영하는 바(BAR) 앞에서 날갯짓을 했다니. 자연스레 나는 <아이다호>가 떠올랐다. 툭하면 쓰러져 길 위에서 파르라니 온 몸을 떨던 마이크. 리버가 연기했던 그 마이크.
나, 나는 어땠냐고? 아마 스무 살 전후의 방자함을 누리며 친구들과 술판을 벌리고 있었을 거야. 곧 군대 (끌려)갈 것이란 핑계로. 그러다, 어느 신문 한 귀퉁이의 요절 소식에 화들짝. 내 청춘의 한 구석에 부는 바람. 휘이이잉~ 또 하나의 바람구두가 저벅저벅 길을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가 버리면, 이내 청춘은 어쩔 것이냐. 피다 만, 연기처럼 증발한 청춘의 한 우상.
그 이후, 이맘 때. 가슴 속에서 서걱거리는 바람소리를 듣자면, 가을 낙엽의 방랑에 눈길을 주자면, 희뿌연 거리의 표정을 보자면, 내 마음은 하염없이 부유한다. 방랑의 숨결은 스멀스멀 대고. 리버가 남긴 자취 덕분이지. 후후. 책임지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는 저 구름의 저편에서 날갯짓하느라 바쁠뿐.
참 유난한 청춘, 리버피닉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그런 독특하고 유난스런 체취를 풍기다니. 환상이로군. 누가 감히 리버의 아우라와 맞먹을소냐. 그 모질도록 슬픈 아우라를...
그게 아마 <아이다호>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던 탓도 아니었나 싶군. 너무 자신을 드러냈는지 몰라도, <아이다호>는 올댓리버피닉스. 그러면서 그는 내게,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장식한 우상. 랭보가 보낸 ‘지옥에서의 한 철’이나 제임스 딘의 ‘에덴의 동쪽’이 어디에 있으며, 짐 모리슨의 ‘The End’를 알고 싶어 하던 시기에 그 대열에 동참한 리버. 더구나 그때만 해도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었고, 브로마이드를 붙여두기도 했지. <허공에의 질주>에서의 리버도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같았지.
어디선가 읽었지. 리버는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었다고. 너무 일찍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탓. <아이다호>의 마이크 역시 유난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 남창에, 부랑자에, 기면발작증에, 동성애까지... 어느 하나 동정 없는 이 세상으로부터 환대받을 요인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마당. 초점 없는 눈빛과 휘청대는 발걸음, 어디에도 안식처는 없고...
그래서 마음 깊은 곳의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아이다호행. '길'은 리버의 유일한 보금자리. 긴장하면 갑자기 혼수상태로 빠져드는 기면발작증을 갖고서도 기어코 길을 나서는 똥고집. 그럼에도 그 길이 있어서 덜 외로워 뵈기도 하더라. 그래, "난 길의 감식자야... 평생 길을 맛볼 거야"라던 마이크의 대사는 아마 리버의 진짜 마음 아니겠어?
누군가는 그러더라. <아이다호>를 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툭하면 쓰러져 둥지에서 떨어진 새처럼 길 위에서 떠는 영화 속 모습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뒹구는 최후와 포개지기 때문"이라고. 어디 나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묻고 싶다. 그 보도블록이 춥지는 않았소. 그렇게 잠이 들이댔소. 이 대답 없는 리버.
그리고, 리버의 영면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
키아누 리브스. <아이다호>에서 함께 했으며 리버와도 절친했다는 친구. 그렇게 절친했던 친구를 보내고, 이후 여자친구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곁에서 떠나보내고 친동생도 백혈병으로 투쟁 중이라던 사람. ☞ 키아누 리브스, "하늘은 내게 공평치 않다" 눈물
세월은 거침없이 흐른다. 벌써 14년. '고작' 스물셋 아니 어쩌면 남들과 같은 나이를 먹지 않았기에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나이로 세상과 절연한 리버. 그가 살아있다면, 속세의 나이로 37. 그러나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채 박제됐으니 상상이 되진 않는다. 더구나 살아있더라도, 리오(강-스페인어)처럼 흘러가고자 하는 리버가 할리우드에 섭생하고 있을 것 같진 않거든. 어딘가에서 길을 감식하고 있을지도.
별볼일 없고, 찌질하지만, 그래서 요절할 일도 없기에, 나는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다시 김수영. 주야를 무릅쓰고 애 쓰고 있는 나의 생.
나비야 나비야 더러운 나비야 네가 죽어서 지분을 남기듯이 내가 죽은 뒤에는 고독의 명맥을 남기지 않으려고 나는 이다지도 주야를 무릅쓰고 애를 쓰고 있단다.
다음날(11월1일)은 (김)현식 17주기, (유)재하의 20주기. 그들은 저 구름의 저편에서 함께 만나서 예술을, 문화를 논하고 있을까. 거긴 말도 통하고, 국경 같은 경계도 없을테고. 차별도 분리 따위도 없고 전쟁도 않는 동네겠지. 나는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