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의 공존

불사조가 된 청춘, '리버 피닉스'

스윙보이 2007. 10. 31. 19:15

누군가에게 가을은 그렇더이다. 가을은 고독 혹은 외로움. 아니면 그리움.
시월의 마지막 날. 아무 것도 아닌 날이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날이 아닌 날.
사실, 쓸데 없는 장난이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만들어 놓은 '시월의 마지막 밤' 환상과,
리버 피닉스의 요절 혹은 영면이 새겨놓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박제된 아름다움.


가끔 그렇게 속절없이 날 울리는 게지.
악마적인 퇴폐와 고질적인 순수를 가졌던 한 청년.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사람.

매년 지겹지 않냐,고 누군가는 묻는데.
글쎄. 아직은 그닥 지겹진 않네.
사실 이렇게라도 꺼내지 않으면,
내가 이 세계의 야만 속에 속절없이 함몰될 것 같고,
감성이 노화하여 땅으로 하강한 낙엽처럼 바싹 으스러질 것 같아.

결국 지난해 긁어부스럼이 된 감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만,
어설픈 그리움의 연서로 기록되겠지만,
내 헛된 바람 중 하나는, 어떤 식으로든 리버 피닉스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리버 피닉스 따라하기> 이런 제목은 어떤가.
아니면, <누가 리버 피닉스에 약을 먹였지?> 혹은 <리버 따라 피닉스로 영면하다>.

흠. 별로 재미없지? 좀더 리버럴한 이야기와 형식이 필요해.
<김수영, 리버 피닉스를 만나다> 이런 건 어때?

시인 김수영과 리버 피닉스는 물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수영은 1968년에 교통사고로 세상과 결별했고, 리버 피닉스는 1970년에 태어났다. 조금이라도 겹쳐지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리버 피닉스가 김수영의 환생이라고? 에이, 설마. 그건 나야, 나.^^;;;;;;;;;;;;;;;;;;

나비의 몸이야 제철이 가면 죽지마는
그의 몸에 붙은 고운 지분은
겨울의 어느 차디찬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지리라
그러나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이러하지는 않다


다만, 김수영은 고독한 사람의 죽음이 어떠한지 안다. 1955년에 발표한 <나비의 무덤>을 보자.
김수영은 고독한 사람의 죽음은 나비의 죽음과 다름을 말했다.
나비의 고운 지분은 등잔 밑에서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고독한 사람이 남긴 지분은 어쩌면 영원히 살결 속에, 가슴 속에 박혀버릴지 모른다.
내가 아는, 리버 피닉스는 그렇게 고독한 사람이었다.
시월은 그렇게 제철이다. 쓸쓸함이 묻어날듯한 낙하의 계절.
나는, 리버 피닉스가 아프다.
 
죽었지만 죽어 소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꼭 어디선가, 나타나 '안녕, 잘 있었어?'라는 말을 건네줄 것만 같은 망자들.

리버 피닉스도 그렇다.
어쩌면 어딘가에 꽁꽁 숨어지내는 것은 아닐런지,
아니면 집시처럼 계속 어딘가를 떠돌거나,
진짜 자신의 별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대체,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리버 피닉스는 세상에 여전히 체취를 드리운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삼투하지 못한,
그래서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물론, 다시 시월의 마지막 날이 왔기 때문이겠지. 10월31일. 
뜻 모를 이야기조차 남기지 않은 채 헤어졌기에,
나는, 우리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