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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책하나객담] 아프간 여인들의 고통에 접속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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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다지 궁금함도 없었던 세계였다. 그곳에 분명 살고 있을 사람들 역시 제대로 생각해 보질 못해, 그들의 희노애락을 떠올려보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구상 어딘가에 분명 존재함에도, 그들은 일종의 ‘로드킬’당한 동물 같은 존재감이었다. 차를 멈추거나,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건 고사하고, 혀 한번 끌끌 차고는 이내 잊어버릴 무심함 같은 것.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그런 내 무심함을 돌아다보게 만들었다. 주인공들의 기구한 인생 역정도 역정이지만, 무엇보다 그 비극이 관통한 시대에 눈길 한번 주지 못했음이 안타까웠다. 물론 나는 다른 나라의 국민이지만, 세계는 잇닿아있다지 않던가. 그들의 불행이 나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책을 통해 내가 놀라고 반성한 것은, 우선 그들의 존재감이었다. 숱한 비극과 역사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와 거기서 파생된 삶의 형태 때문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아프간의 얼굴은, 전쟁이 다였다. 구소련의 침공이 있었고, 그들이 물러난 후에도 내전이 끊이질 않았다는 것. 건조한 미디어의 보도에서 아프간은 그저 타자화된 대상이었다. 면을 채우기 위한 면피용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부르카로 꽁꽁 가리고 있었던 탓이었을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의 무심함이었겠지만.

어쨌든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아프간과 아프간인들에 대한 너무도 짧은 나의 인식은, 부르카를 쓰고 있던 탓이다. 직접 썼든, 타인이 해줬든 간에 말이다. 일종의 망사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것과 같았기에 낯설고 좁을 수밖에 없었던 시야. 또 부르카를 두른 여자의 얼굴은 남편만이 볼 수 있다는 라시드의 얘기처럼,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해 치장이나 화장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프간 여인들의 고통은, 이 책의 주요한 엔진이다. 한마디로 찌질한 남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고통을 강요받고 슬픔을 안고 살아야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 아주 어설프게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여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일상다반사이거나, 전쟁 앞에 일방적인 희생을 당했다는 것. 그럼에도 소설 속 두 여인의 고통에 나는 눈을 찡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이 전쟁 통에서 아프간 여인들의 평균적인 삶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나, 그렇다고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한 폭력적인 남자의 집에 갇힌 두 여자

하라미(사생아)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 마리암의 생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찌질한 남자들에 의해 줄곧 좌우된다. 거의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종일관 답답하게 끌려 다니다시피 한다. 자신을 대상화하고 다른 사람, 특히 남편의 눈치만 본다. 폭력 앞에서도 무던해지고, 어떤 저항이나 반항의 기미조차 없다. 그녀의 고통을 묘사하는 글이 나올 때마다 나는 답답하면서도 궁금했다

보건대, 아마 그것은 어머니, 나나와 연관이 된 듯하다. 일주일에 한번, 세상을 이어주는 고리인 아버지, 잘릴을 만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 마리암. 그런 마리암이 나나의 경고를 어기고, 몰래 잘릴을 만나러 헤라트로 간 날, 어머니는 죽는다.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이 결과적으로 비극을 잉태하고 말았다. 그런 트라우마를 안은 마리암에게, 나나는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면서도, ‘참는 것’이 유일하게 필요한 기술이고 가진 전부라고 가르쳤다. 마리암의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에 나나의 책임도 있다.

또 유일혈육이나 다름없던 나나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마리암을 더 큰 해악 속으로 밀어 넣은 셈이다. 폭군 남편인 라시드에게 팔리듯, 결혼하게 된다. 나나가 죽고, 마리암은 잘릴의 위선과 공허, 허세를 깨닫게 되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고, 마리암이 처음으로 삶의 행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모든 걸 쏟아 붓는 순간이 올 때까지, 마리암의 생은 온통 잿빛이다.

나는 나나가 마리암의 생을 꼬이게 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육을 차단한 것도 그렇다. 스스로 가능성을 차단하고 그것을 아이한테까지 답습시킨 과오. 그런 면에서, 나나는 또 다른 비극을 겪은 라일라의 아버지, 바비와도 대비된다. 바비는 라일라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혼은 늦출 수 있어도 교육은 그렇지 않다”는 바비의 가르침이 라일라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특히나, “여자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면 사회는 성공할 수가 없다”는 확고한 신념도 이에 일조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라시드의 폭력에 함께 노출됐음에도, 삶의 방향이 달라진 것은 그런 요인도 있었을 거라고. 물론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시대가 다른 면도 크겠지만, 판이하게 다른 여성관이 주입된 것도 생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형성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나를 일방적으로 탓할 생각은 없다. 그녀로서도 분명 그렇게 해야 할 이유나 환경이 뚜렷했다. 마리암을 지키고 싶다는 진심에서 그랬을 테니까.

어머니의 충고를 끊임없이 듣고, 아버지의 위선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마리암은 라시드에게 쉽게 의존하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여자들의 자립을 기본적으로 봉쇄한 사회의 탓도 있다. 더구나 10대 중반의 나이에 억지 결혼한 소녀로서는 어쩔 수없는 선택일 것이다. 그럼에도 라일라의 모습과 비교하자면, 마리암은 훨씬 무기력하다. 일곱 번의 유산을 거치는 고통 속에서도, 되레 그것을 남편에게 미안해하고 스스로 짐이라고 생각할 정도라니. 더구나, 그 남편이라는 작자는 입으론 명예와 체신을 떠벌리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약자에게 폭력을 거침없이 행사하는 비열함 그 자체가 아니던가.

책을 보는 내내, 사실 나는 마리암의 행보가 답답했다. 아버지, 특히 라시드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무조건 참고 견디려는 마리암에게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지만, 나는 그 무기력이 마리암을 이미 죽였다고 본다. “나는 과연 살아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살아있다”고 답할 수 없는 상태. 마리암의 무기력이 탈출구 없는 감옥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이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한편으로 그렇게 죽어있었기 때문에, 아지자의 작은 몸짓과 라일라의 작은 친절에도 한없이 흔들렸으리라. 적대적이었던 마리암과 라일라의 화해가 다소 뜬금없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리암의 상황을 감안하면, 약간은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찰나처럼 다가온 행복에 견고한 벽에 금이 가는 것과 같은. 아지자가 마리암에게 얼굴을 파묻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의 황홀감. 나는 그 기분을 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울어줬을 때의, 그 기분을. 마리암의 느낌처럼, 마음은 진짜 날개를 단다. 

라일라는 마리암에 비하자면, 확실히 축복받았다. 찌질한 두 남자에게 생을 저당 잡힌 채 지옥에서의 한 생을 보냈을 마리암에 반해, 라일라는 자존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준 바비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알려준 타리크라는 남자들이 있었다. 라시드와의 악몽 같은 삶이야, 예기치 않게 선택해야만 했던 비극이었다. 로켓포로 부모를 잃고, 이미 전쟁을 피해 다른 나라로 간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열다섯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너무도 협소했으니까.

그런데 라일라에게도, 방법은 달리해도 마리암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의 존재는 그닥 긍정적이지 않다. 죽은 오빠들의 삶 속에 라일라를 방문객으로 존재하도록 만든 어머니라니. 어머니의 존재가 어쩔 수 없이 딸들에게 상처를 준 것은, 두 여인의 공통점이다. 아버지의 위치와 영향력은 분명 달랐지만. 그래서 이런 편견도 갖게 만든다. 아프간에도 윗대의 여자가 아랫대의 여자에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아닐까하는. 남자들을 탓하고 타깃으로 삼았어야 했음에도, 같은 여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두 여인이 맞닥뜨리는 삶의 순간순간은 아프간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다. 나는 그것이 이 책이 지닌 미덕 중 하나라고 본다.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왕정국가가 쿠데타에 의해 붕괴되고, 구소련의 침공을 받고, 공산화에 이어 탈레반 정권수립까지의 아프간 역사를 여인들의 삶 속에 병치한 이 소설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가와 역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애환과 슬픔, 그들을 옭아매는 규칙 혹은 문화가 녹아있었다. 남녀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의 시선, 영화 <타이타닉>이 휩쓴 거리의 풍경 등 아프간에 아로새겨진 어떤 문양들.


세계의 모든 것은 잇닿아 있음을...

아프간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 아니다. 미국이 발발하여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에 우리 역시 발을 담그고, 비극적인 인질사태까지 겪지 않았던가. 나는 그런 아프간의 속살을 너무 몰랐다. 사건에만 치중했을 뿐, 정작 그네들의 삶엔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 아프간의 연이은 전쟁과 끔찍한 현대사가 두 여인의 삶을 통해 얼개를 드러냈고, 이후의 삶이 지금의 우리와 연계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얘기하겠는가. <독일, 창백한 어머니>헬마 잔더스 감독이 말한 진실, “우리와 무관하다고 외면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다시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그 명제를 되새김질해야 했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전쟁은 그렇듯 단순히 라시드와의 전쟁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프간을 침공한 외세와의 전쟁이요, 슬픔과 고통을 강요한 남성우월주의와의 전쟁이요, 허위와 위선으로 점철된 종교적 근본주의와의 전쟁이었다. 살아야한다는 것은 그래서 절박한 과제다. 한결같이, 죽음, 상실, 상상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아프간에서 살아남은 라일라는 그래서 바라본다.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라일라도 끊임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죽음에 뛰어들고픈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슬픔을 삼키고 치욕을 견디면서 결국은 살아야 한다는 명제에 기울었다. 때론 죽음이 매혹적이고, 뱀처럼 혀를 날름거려도, 생을 방기한 죽음은 비겁한 선택이었으리라. 라일라는 살았고, 앞서와 달리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문체를 달리한 이야기는 그것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저자의 선택이 아니었을까싶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이 두 여인의 우정 혹은 연대를 설득력 있게 그렸다고 보진 않는다. 두 사람의 연대는 비약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순간순간 애틋한 면이 있긴 해도 그들의 우정이 감복을 이끌어낼 정도로 잘 묘사되지도 않았다. ‘찬란한 희망을 봤다’는 수사도 너무 낭만적이다. 이후의 라일라의 삶이 마냥 희망에 차 있을까. 천만에. 그곳은 여전히 불안하고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전장이다. 그네의 생이 여전히 팍팍하고 힘겨울 것이라는데 한 표 던지고 싶다.

또한 나는 아프간 출신 미국 이민자인 저자의 미국에 대한 동경과, 어쩌면 미국인 독자를 겨냥한 타협의 가능성을 본다. 그는 바비의 입을 빌어 “미국인들이 너그러운 사람들”이며 “미국인들은 그들이 자립할 때까지 먹을 것을 주고 경제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아프간의 슬픔과 고통에 미국 역시 분명 책임이 있음에도, 슬쩍 어떤 면죄부를 주고자 했음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가진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미덕에 좀더 주목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음이 중요하며, 지구상에 나와 함께 발붙이고 있는 타인과 세계의 고통에 아주 조금이라도 더 민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분명 추상적인 죽음이고 고통이다. 내가 아는 이의 죽음·고통과 다르고 막연하다. 하지만 6단계만 거치면 세계의 누구와도 연결되듯, 세계의 모든 것은 나와 관련돼 있고 관계가 있다. 그 막연하고 다름 속에 길을 놓고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나는 새삼 배운다. 그것은 언제고 나의 일,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기에 무기력하게 있어선 안 된다는 것도.

나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기억하고자 한다. 이 감상문도 기억하기 위해 쓰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힘은 미욱하기 짝이 없고, 그들의 삶과 세상을 바꾸기엔 한없이 작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 할지라도, 나는 내 기억 속 작은 모퉁이를 그들을 위해 할애하고자 한다. 부디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예민해질 수 있기를.

어쩌면 나는 눈발이 날리면, 그들의 고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 고통 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말한 나나. 나나는 이어 말한다. “그래서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 없이 견디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