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는 당신을, 감탄한다...

글을 왜 쓰는가


세상 거의 모든 글쓰기는, '인정 투쟁'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 좀, 봐 달라.
나, 이런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 아니면 쉬어 알았으면 뛰어/ 그래 내가 원래 그래~♪/ 그래서 뭐 어떨래/ 나 이런 사람이야 뛰어~♪)
스스로 인식하건 그렇지 않건, 인정 받기 위한 욕망의 발로가 '글쓰기'다.

이십대의 한때, 내 안의 것을 배설하기 위해서라고 씨불렁댄 적도 있었다. 
구라였다. 배설은 얼어죽을. 배설은 똥이나 퍼지르면 충분한 일이다.
 
아아 물론, 오해는 마라.
인정 투쟁, 나쁜 것도 아니요, 해선 안 될 일도 아니다.
가령, 노숙인 잡지 <빅이슈>는 인정 투쟁의 좋은 예다.
노숙인은 게으르고 위험하며 낙오자라는 인민들의 인식에,
성실하고 친절하게 일하는 노숙인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 좋은 예다.

아, 글고 보니, 내가 한때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던 이유는,
그때 내 사랑,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인정 투쟁이었다.
오래 전, 생애 첫 칼럼을 연재하기로 했던 이유도, 
당시의 그녀에게 인정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글을 쓰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김연수 였던가, 분명하진 않지만, 
한 작가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글을 썼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현재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알흠답고 개념 있는 그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 인정 받기 위한 몸부림.
 
뭐, 인정 투쟁에 대한 허술한 객담은 이걸로 뚝!
다시 본론으로,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 펴냄),
에 대한 기사였다. 오웰의 작가론글쓰기는 결국 정치적이다

기사는, 왜 쓰는가, 이에 씨불렁대지 못한다면,
작가도 아니요, 기자도 아니요, 라고 했지만,
나야 뭐, 더 이상 기자도 아니요, 작가는 언감생심인, 
흔해 빠진 날품팔이 블로거에 불과하지만,
왜 쓰는가, 왜 '아직도' 쓰는가, 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맞다. (블로그엔) 안 써도 그만이다.
생계 지탱을 위한 최소한의 글쓰기 외에 이곳을 글을 쓸 이유 따윈 없다.
글쓰기 연습? 그건 블록이 아니라도 된다. 공간은 쎄고 쎘다.
소통? 에이, 나는 대면과 직관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블로고스피어에선 소통의 본질을 들추진 않는다.
물론 소통의 한 도구라는 것, 부인하진 않는다.

블로그, 트위터 등에 글을 쓰는 것이 온전하게 개인의 것에 머물 순 없다.
개인적·사변적인 것이 오가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글을 보고 읽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내 심정을 알아달라고 외친다.
 
성정이 못돼서 그런 것이겠으나,
아주 간혹, 행간의 내 마음을 왜 몰라주냐고 징징대는 인간을 보면 역겹다.
타인의 마음에 대해선 알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물론 나 역시도 그러면서도 말이다. 모순덩어리! ㅠ.ㅠ

자신에 대한 '실질적 정직'이 글쓰기의 첫 단추라고 한,
이만교의 말은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쨌든, 기사를 보면 조지 오웰의 '글쓰기론', 글쓰기의 동기는 이렇다.

첫째,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나를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 하고 싶은, 그런 따위 욕구란다.
맞아, 맞아. 오웰은 "이기심이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라고 했다.
인정 투쟁과도 맥이 닿는다. 이기심이 글을 나아가게 한다. 
그러니 이기심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겠다.
 
둘째,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낱말과 그의 적절한 배열이 주는 묘미,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
 
셋째,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후세에 보존하려는 욕구. 기록 욕망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

이 네 가지 지점에서 '나는 왜 쓰는가', 를 생각한다.

둘째와 셋째는, 작가도 기자도 아닌 나로선, 다소 먼 지점이다.
물론 '이때 나의 감정이나 상태가 이랬구나', 하는 걸 기록으로 남기고픈,
개인사의 지점을 넓은 의미의 '역사적 충동'으로 해석할 수는 있겠구나 싶다.

그리하여, 첫째와 넷째가 내겐 더 깊이 와 닿는데,
이기심이야 앞에서 어설프게 언급한 바 있고,
그래, 내게도 분명 '정치적 목적'이 있다.

곧, 나와 지향점이 같거나 비슷한 동지를 한 명이라도 더 찾고 싶은 욕망.
슬쩍슬쩍 언급했지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
이 깽판에 휩쓸려 더 이상 부유하듯 살고 싶진 않다.

나는 비록 소심하게 툴툴거리는 보통의 인간이지만,
함께 만들고 싶은 사회를 위해 분투하는 누군가를 동지로 삼는 것.
그것이 설혹 좌절로 그치는 한이 있어도 힘을 모아 노력해 보는 것. 

나는 그렇게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
오호, '너, 정치적인 동물이구나'하고 말하면, 맞다!
이른바 '정치판'이라는 협소한 의미의 현실정치에 뛰어들 일은 없겠지만.

얼마 전에도 툴툴거린 바 있지만,
조지 오웰을 통해서 나는 거듭 확인한다. ^.^
문화·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고 정치적이지 않아야 할 까닭은 없다.
오웰은 이리 말했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냐하하, 그래. 오웰을 통해 내 글쓰기의 한 이유를 확인했다.
여섯살 무렵부터 작가가 되리라 믿고, 문학소년이었던 오웰은,
마흔 셋에 "기발하게 쓰기보다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작가가 됐단다.

비록, 작가적 욕망은 그닥 없지만,
잡문날품팔이로, 때론 매문도 하면서 글쓰기를 해야 할 나는,
오웰의 이 말을 꾹꾹 눌러 담는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로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돼 있던 때였다."

나나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뭐? 이 책을 사서 읽는 것. 오웰을 만나는 것.
그러니까, 당신은 왜 쓰는가.



참, 글쓰기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당신에겐, 거듭 이 말부터.
"글쓰기의 첫 번째 열쇠는 쓰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파인딩 포레스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