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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19세기 남근중심에 저항한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19세기 남근중심에 저항한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8.30~1851.2.1)

페미니즘을 담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


괴물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인식돼 있는 ‘프랑켄슈타인’은 1818년에 출간된 소설입니다. 공포소설, 공상과학소설의 고전이죠. 영화로도 많이 제작돼 아류까지 합하면 130편 이상 제작됐다고 합니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과학자 이름인 것, 아시죠?

그런데, 소설 《프랑켄슈타인(원제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이 페미니즘도 다뤘다는 사실 아세요?

괴물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19세기 식민지 열강이자, 여성성을 극도로 억압한 당대의 남성성을 대변합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남성성 과다분비의 프랑켄 박사의 분별없는 열정이 빚어낸 파국. 소설은 어머니 없이 태어난 괴물의 만행에 따른 결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당시 영국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오직 하나의 부모로서의 아버지’라는 주장을 폈어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남성의 오만한 의식이 팽배한 시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런 시대의 공기에 저항한 것이 이 소설이죠. ‘오직 하나의 부모인 아버지’인 프랑켄 박사가 갖는 결함과 한계, 실패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외치는 괴물의 절규에서 어머니 없이 태어난 자의 불완전성과 콤플렉스가 드러나죠.
그래서 이 소설을 여성성을 억압하는 남근중심적 사회를 향한 경고로 읽는 시선이 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리처드 로스웰이 그린 메리 셸리의 초상화

이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 낸 작가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메리 셸리. 1797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급진적 무정부주의 철학자인 윌리엄 고드윈이며, 어머니는 열렬한 여권운동가(페미니스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입니다.
그러나 메리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합니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타이틀을 갖고 있는 울스턴크래프트가 메리를 낳고 열흘 만에 숨을 거뒀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은 것 마냥, 사상적 DNA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상가 집안이라는 지적인 환경에서 자란 그는 총명한 재원이었습니다. 새어머니의 미움도 한편으로는 책이라는 친구를 둘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하네요.

메리의 삶은 그러나 평탄치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도 그랬지만, 아버지와 교류하는 사상가와 문학가의 드나듦 속에서 시인 퍼시 비쉬 셸리와의 만남 또한 그랬지요.

결혼한 상태였던 퍼시와의 첫 만남에서 사랑에 빠진 그는 16세의 나이에 퍼시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퍼시의 전처는 둘의 사랑에 절망해 자살을 했고, 메리는 아버지와 의절했습니다. 사랑의 도피까지 감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꾸렸습니다. 부모의 영향을 받아 탈관습적이었던 그다운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적 재능을 공유하고 자극한 남편이나 시인 바이런과 같은 친구의 교류와 격려로 메리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사건은 문학사에서 하나의 전설처럼 내려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은 역시나 굴곡 투성이였습니다. 퍼시와의 사이에 낳은 네 아이 중 세명이 일찍 죽었고, 남편 퍼시도 서른 살의 나이에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메리는 이후 30여년을 더 살면서 《발페르가 또는 루카의 왕자 카스트루치오의 삶과 모험》 《최후의 인간》 《로도르》 《포크너》 등을 발표했지만, 퍼시와 보낸 시절만큼 문학에 의욕을 불태우지도 못했고, 세대를 뛰어 사랑받는 작품도 내놓질 못했습니다.

드라마틱하면서도 극적인 생을 살았던 그에게 사랑은 어떤 존재였던 걸까요.

(※ 참고 : 데일리서프라이즈 <류가미의 문예기행(27) 메리 셸리, 새로운 장르의 어머니>,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 www.britannica.co.kr, 엠파스 실시간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