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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털 싱글스토리

돈 버는 기계가 ‘아직’ 아니라서, 다행이다

돈 버는 기계가 ‘아직’ 아니라서, 다행이다


연말이다. 그게 핑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한 잔 술에 마음도 나눈다. 그리고 서로의 근황을 묻고 빛바랜 추억도 끄집어낸다. 한 살 더 먹는다는 비련(?)까지 곁들여서. 8명 중에서 나와 다른 녀석, 두 사람만 싱글이었다.

다들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있다. 가업을 물려받아 2세 수업을 쌓는 녀석도 있지만, 거개가 가장 보통의 직장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른바 ‘정상성’의 범주를 관통한 존재들. 학교 졸업 뒤 직장 구하고 결혼을 치른 뒤 아이를 기르는 궤도. 어떤 나이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틀을 충분히 잘 따라간. 그들은 늘 내게 묻는다. ‘결혼’ 언제 하냐고. 뭐, 별로 해 줄 말은 없다. 나도 모르니까. ^^;

그렇게 한창 주거니받거니 떠들다보면, 아이(들)과 아내 등 가족 얘기로도 화제가 휙 돌아가 있다. 자연스러운 경로다. 그들은 ‘가장’이고, 우리의 관심사는 예전과 달라졌다. 온전하게 우리 자신에게 집중했던 그때와는 완전 다르다.

그걸 못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세월의 흐름은, 나이듦은 분명 그런 것이니까. 어깨 너머로, 간접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로 나도, 어설프게나마 그 이야기에 끼어든다. 분명, 니가 뭘 아냐는 타박을 들을 것이 확실해도.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해서, 그것도 5년을 훌쩍 넘은 한 녀석이었다. 어떤 화제를 씹는 와중이었는데, 자신의 이야길 꺼낸다. 심각한 얘기의 와중도 아니었다. 녀석도 심드렁하게 얘기한다. 술도 걸쳤고 집도 머니까, 집에 안 들어가도 된단다. 아내에게 혼나지 않냐? 물었다. 아내가 ‘대놓고’ 그랬단다. “술 먹고 집에 안 들어오고 뭘 해도 좋으니, 돈만 많이 벌어와.” 말하자면, ‘돈 버는 기계’. 녀석도 순순히 인정한다.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눈치다. 그냥 그런 수순이 당연하다는 듯.

글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겠지만, 정말 의젓했다. 옆에서 다른 녀석들도 한마디씩 거든다. 역시나 당연하다는 듯. “정 때문에 살지, 뭐.” “아이만 없어봐라, 왜 계속 같이 사냐.” “그래도 내 와이프는 대놓고 그런 얘기는 안 해.” 그리고 녀석들, 주제넘게 충고도 한다. “사랑? 살아봐라.” “(결혼) 하려면 빨리 하든가, 아니면 하지 마” 등등.

숫제 그들은 자신이 아이 혹은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동화에 현혹돼 유폐된 왕자처럼 말한다. 나의 제수씨들도 대상만 바꿔 똑같은 얘길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와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동화의 꼬드김에 넘어가 자신의 진짜 생에서 실종됐다고.

사실 하나도 안 놀랍다. 사랑했다. 결혼했다. 애를 낳았다. 정 때문에 산다. 뭐, 귀에 딱지 얹히도록 듣던 레퍼토리다. 고만고만한 궤적의 널리고 나자빠진 쳇바퀴. 하긴 그들도 그걸 알면서도 바퀴에 올라탄 것 아닌가. “거의 모든 부부가 그렇게 서로의 어떤 면은 보여주지 않은 채, 서로 알아주지 못한 채,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물론 그렇지 않은 부부도 있지만, 그건 일종의 희귀종, 천연기념물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친구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아직 나는 돈 버는 기계는 아니구나, 하는 일말의 안도감이 감쌌을 뿐. 우리는 그렇게 술을 마셨다. 한 해를 들이켰다. 2008년도 그렇게 가고 있었다. 아마, 나는 내년에도 궁상을 떨게 될 것 같다.

싱글남 ‘궁상남치워’

[몰링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