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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너에게 켄 로치를 권한다 … <빵과 장미>

노동절. 메이데이. 118주년.
그러나, 이땅에서 노동절은 축제가 아니다.
노동자에겐 의당 축제가 돼야 할 날이건만, 이땅은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특히나, '(대)기업 프렌들리'를 공공연히 내세우는 정부에 '노동자'라는 존재가 있을리 만무하고.

나는 다시 그들을 생각한다.
KTX의 멋진 언니들(승무원), 이랜드-뉴코아 노조원들, 코스콤 비정규직지부...
그리고 이땅의 모든 비정규직들.
그들이 만면에 함박웃음을 띄우는 시절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 목소리 낮춘 노동절…비정규직만 ‘냉가슴’

역시나 노동절이기 때문에, 내가 권하는 이 한편의 영화. <빵과 장미>.
켄 로치. 그 이름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래는, 4년 전에 긁적인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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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내 생각에 촬영은 심플하고 경제적이어야 한다. 경제적인 촬영의 핵심은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것이다. 와이드 렌즈나 망원 렌즈도 잘 쓰지 않는데, 그건 렌즈가 사람의 눈과 같아야 한다고 믿어서다. 대상을 조용히 응시하고 연민하는, 사람의 눈 말이다. (켄 로치, 2002년 칸 영화제에서 한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노동절. 메이데이. 세상이 변했다고 변해간다고들 얘기하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나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차별을 가늠한다면 말이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세상과의 긴장과 불화를 이루고 있는 켄 로치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김규항씨는 일전에 유례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수렁에 빠진 한국에, 80년대의 수많은 좌파청년들이 영화계에 투신했음에도 자본주의와 긴장을 이루는 감독이 한명도 없다는 사실에 일종의 '기대의 좌절'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현대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고집스런 감독이기도 하다. 한길을 걸으며 한결같은 얘기를 건네고 있다는 것, 계급간의 갈등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감독, 그가 다룬 스크린에는 늘 '노동자'가 핵심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114주년을 맞이하는 노동절을 맞아 켄 로치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에도 그의 영화가 적잖이 소개됐고 팬도 꽤 있다. 사실 부끄럽지만, 그의 숱한 필모그래피 가운데 내가 접한 영화는 <빵과 장미> <스위트 식스틴> 단 2편이다. 그래도 난 그 두편의 영화를 통해 켄 로치의 팬이 됐다. 그의 작품은 영화적인 기교가 아닌 진정성으로 승부한다. 나는 그 진정성에 매료된 관객일 뿐이지만 그의 영화들은 내 현재를 투영하고 반추하게끔 만든다. 그래서 나는 여전할 그의 새 영화를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다.

어쨌든 노동절을 맞아 권하고 싶은 건 <빵과 장미>다. 2002년 6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대회 당시 개봉했던 영화다. 월드컵과 켄 로치. 정말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색깔만 놓고 보자면 같은 붉은색으로 치장될 법도 하지만 '돈 잔치' 월드컵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켄 로치의 영화가 조화를 이루기엔 간극이 너무 컸다.

외계인이 되다

<빵과 장미>(Bread and Roses)를 봤던 당시, 졸지에 외계인이 된 사연이 있었다. 한 영화 사이트에서 이런 글이 날라왔다. "…한국이 48년만의 월드컵 첫 승리를 거두던 날 밤 ○○시사회는 사상 최저의 참석률을 기록하면서, … 머 그건 인정해야겠죠. 어차피 축구도 영화도 말 그대로 보고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이니까요. 그래도 그 엄청난 인파들을 헤치고 꿋꿋이 시사회장을 찾아주신 분들, 그날 광화문의 어느 극장에서 <빵과 장미>를 보고 어이없이 외계인이 되어야했던 그 분들...이런 분들이 있어서 ○○는 행복하답니다. 한국의 역사적인 월드컵 1승 못지 않게...."

한국이 월드컵 역사상 처음 승리를 거둔 그 날 그 시간(폴란드전, 2002년 6월 10일). 난 '외계인(!)'이 되어 <빵과 장미>와 마주 대하고 있었다. 심정적 동지라고 여긴 12명의 사람들과 함께. (경기가 열린 부산구장에는 5만명이 결집했다고 그랬다. 5만명 對 12명!)

영화를 본 뒤 결론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엑스터시'를 포기하긴 했지만 그 영화는 누군가의 말처럼 '영혼을 위한 보약'이었다. 켄 로치는 아니나 다를까 인간에 대한 선한 시선을 스크린에 담아 생존과 '인간다운' 삶 사이의 간극이 벌어져선 안 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었다. <빵과 장미>에서 '빵'은 인간의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여유나 삶의 질을 의미한다. 반세기 전 브레히트는 "지금 장미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그 밖의 모든 억압과 불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지만 영화는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우리네 사람살이를 들려주고 있었다. 영화는 흔히 얘기하듯 "밥만 먹고 살 수 있냐"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에 대한 사고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잠깐 샛길로 빠져 1세기 동안 지난하게 전개돼 온 '빵과 장미'의 역사를 살짝 들여다보자.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의 룻저스광장에 모인 1만5,000명의 섬유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아동 노동 금지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들이 채택한 슬로건이 '빵과 장미'였다. 그리고 2년 뒤 독일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클라라 제트킨은 이 날을 세계여성의 날로 제정할 것을 제안, 90년 이상을 기념해 오고 있다.

또 지난 1995년 5월말 캐나다 퀘백시에서는 800여명의 여성이 10일 동안의 행진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 동일노동 동일임금, 이주 여성 노동자의 권리, 공공복지 부문에서의 일자리 창출을 포함한 사회 인프라 프로그램 구축 등 9개 내용을 요구했다. 이는 '빵과 장미의 행진'이라 불렸고 요구 사항 중 70%가 정책에 반영되기도 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나라, 90여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빵과 장미'라는 슬로건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영화까지 나온 것은 어쩌면 21세기에도 이 문제가 지속될 지도 모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장미에게 미소를 띄우게 하는 방법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힘겹게 넘어오면서 '불법'이란 딱지가 붙은 이민자 '마야'(파일러 파딜라)는 얼어죽을 천사의 도시, LA에 발을 디딘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마야의 처지를 잘 대변해준다. 그리고 마야는 또 다른 정체성인 '노동자'로서 생활을 시작한다. 자본주의 바이러스의 포자이자 세계 최강국이라고 뻐기는 LA의 마천루 빌딩 숲. 마야는 언니 로사가 일하는 빤질빤질하기 그지없는 최고 소득의 변호사와 펀드매니저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LA에서 가장 중요한 빌딩 중 하나'인 삐까번쩍한 고층건물의 환경 미화원으로 취직을 원한다.

그러나 로사를 따라 간 마야가 마천루 앞을 서성이자 경비원은 "여기 서 있으면 안돼요"라는 말로 그녀가 처한 입장을 알려준다. 마야는 결국 성적(여성), 인종적(라틴계), 계급적(노동자)으로 약자에 지나지 않는다. 간신히 언니 도움으로 미화원 자리를 얻었지만 첫 달 월급을 중간관리자에게 헌납해야 하고 휴가나 의료보험은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미화원의 유니폼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직업적 특성이 부각되는 비밀이 있다. 빌딩 내에서 그들은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찾을 수가 없다.

또 마냥 착취당하는 고용인에 불과한 이들에겐 인종과 계급의 벽이 높기만 하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언어적 차별은 곧 계급적 구획으로 바뀌고 법적으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조차 빵을 틀어쥔 고용주에 의해 일방적으로 짓밟힐 뿐이다. 약자는 일자리를 구하고 백인 사장과 싸우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하며 단 몇 분 지각으로 짤리고 마는 현실은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시궁창에 박혀버린 관념일 뿐이다. 이렇듯 빌딩의 위용에 버금가는 악덕 용역업체의 횡포는 환경미화원들의 삶을 철저하게 지지리궁상으로 구겨 넣는다. 그 악덕업체는 미국 최대 청소용역업체라고 설정돼 있는데 웃긴 건 그 이름이 '엔젤(Angel)'이다(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이름이란 말인가).

그런 마야에게 '내 휴지통 속으로 들어온' 그 남자가 나타난다. 인권변호사인 샘(에이드리언 브로디)은 미화원의 권익보호를 위해 싸우면서 미조직화된 그들에게 하나둘 권리를 일깨워준다. 로사의 집에 찾아간 샘은 17년 전 상황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악화된 임금과 보험혜택을 들먹이며 최빈곤층에게 수십억 달러를 갈취한 강도(고용주)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당한 권리의 획득을 위한 단결을 외친다.

과연 그들은 순순하게 자신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고 찾으려할까. 물론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빵'이란 일자리를 얻는 데만 급급했던 미화원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체화시키는 과정은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일과도 같다. "조합에 들면 인생 고달파 질 거야" "노조는 안돼! 당장 해고야" 같은 협박을 일삼거나 노조결성 주동자 색출을 위해 노동자들 사이에 이간질을 부추기는 중간관리인, 내부에서 불협화음을 끊임없이 연주하는 불평분자들.

하지만 미화원들은 샘과 함께 엇박자였던 발을 맞추는 연습을 되풀이한다. 인간적 자존을 위해, 계급적 장벽을 깨기 위해 자신의 해고를 감수하면서도 배신하지 않는 선배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배신자를 감싸 안아주는 넉넉함도 있다. 그것이 바로 전진을 위한 단계임을 영화는 차근차근 보여준다.

왠지 무거울법한 이 영화를 밝고 경쾌하게 끌어주는 건 주인공들이 지닌 캐릭터의 생기와 유쾌하고 날카로운 유머코드가 곳곳에 배치된 덕이다. 돌발적이고 깜찍한 해프닝이 현실과 괴리되지 않게끔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농담처럼 툭툭 내뱉는 말에 뼈아픈 진실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도 한다. 마야는 노조 때문에 대학 등록 기회를 놓칠 뻔한 동료를 위해 슈퍼마켓에서 절도 행각을 저지르기도 하고 샘은 미화원들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다가 마야의 유혹을 받고 허물어지기도 하지만 신념을 향한 유연한 자신감으로 뭉쳐 있다. 노동운동이라는 딱딱하고 강건할 것만 같은 이미지에 인간다운 부드러움과 세속성을 자연스레 불어 넣어주는 이런 장면은 긴장감을 풀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철저한 구획을 원하고 개인의 매몰화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근본적인 '건강성'과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건강하게 썩어 들어가면서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화면 곳곳에 배어나온다. 일상과 유리된 정치의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빵과 장미>의 노동자들은 제목처럼 "We want Bread, But Roses Too(빵 뿐만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라고 외치며 시위에 나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20세기 초반 미국 이민 노동자들의 투쟁 구호였던 '빵과 장미'가 21세기 미국으로 이민 온 노동자들의 구호로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은 그렇게 노동자들에게 게을렀다.

미화원들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지금 당장!"이란 구호를 통해 적정임금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도둑질도 아닌 임금인상을 요구했을 뿐인데 쓰레기 취급을 받는 현실은 자본주의가 창궐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엇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둘 깨달음을 통해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도 거저 장미를 주지 않는다,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 장미를 얻을 수 있다"고. 또 가끔 잊고 있었던 진리를 들먹인다. "우린 항상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빵과 장미>는 의당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애정을 기본삼고 있지만 일방적인 교훈조의 이야기를 설파하지 않는다. 새삼스레 노조 결성을 '선동'하거나 '충동질'하는 영화도 아니며 단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음을 전달할 뿐이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 촬영이 끝난 직후 실제 LA 미화원들은 거리시위에 나서 3년간 25%의 임금인상을 얻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이런 일례에서 보듯 켄 로치의 영화는 진정성과 현실에 뿌리를 둔 접합성을 지니고 있다. 진정 한 사람의 건강한 시선이 세상에 빛을 전할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그는 증명한다. 솔직히 나는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새우깡에 자꾸 손이 가듯 '희망'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켄 로치 감독이 부럽다.

신자유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시대 앞에 노동자들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천착하게끔 전장터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있는 자들과 달리 목숨을 담보로 세상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 현실은 현재진행형이다. '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는 개발독재시대를 지나며 폐기처분됐어야 할 구호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아직 장미는커녕 빵을 공급하는 것에 인색한 천민자본주의의 주구들에게 켄 로치의 일갈은 한마디로 '칼'이다.

그리고 노혜경씨는 일전에 그런 얘길 했었다. "모든 소수자들이 자기 문제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들의 그 훌륭한 사회기획 안에 내 자리도 있는가라고.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경제가 발전한다면 여성이 '왜' 봉사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보거나, 조직이 나를 일방적으로 희생해야만 유지된다면 내가 그 조직의 일원일 이유가 무엇인가 같은 지극히 이기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해 볼 차례다. '절대소수의 최소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절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없다'"고. 노동자들은 '장미'를 묻고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최대행복을 위한 길이다.

굳이 노동절이 아니더라도 너에게 켄 로치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