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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

열 아홉, 서른 하나의 죽음

끙. 머릿속은 뒤죽박죽, 가슴은 헝클헝클이었던 어느 여름날의 풍경.    
충공(충격과 공포)이라고 해두자.

우선, 나 같은 '모태야큐'형 인간에게, 세상은 두 개의 하루로 나뉜다.
야구(경기) 있는 날, 야구 없는 날.

야구 없는 날, 이런 충공이 훌쩍 날아들었다.
'여신 석류' 혹은 '야구 여신'의 품절 예고!
지바 롯데 김태균, 김석류 아나운서와 12월 결혼 


불과 며칠 전,
사직에서 노떼 유니폼을 입고 여신적 투구폼으로 므훗함을 선사하던 그녀가,
허거걱, 야구 없는 날, 이런 깜놀 충공 선언을!

뭐, 충공이라 과대포장 표현했다만,
'나, 이 결혼 반댈세'라거나,
'야구선수랑 연애 안 하겠다더니 이게 뭥미'라는 둥의,
땡깡(!)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을세다.

아니 그런 땡깡 부리는 일부 사람들, (결국, 여신의 미니홈피폐쇄를 불러온!)
자기가 여신님이랑 정녕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었수?
뭔 개지랄인가 싶소.

두 사람, 잘 어울린다고 생각드는데, 
다만 아쉬운 건, 여신이 결혼하면 '알랴브베이스볼'을 떠난다는 게, 흙. 
여신의 또랑또랑한 농지꺼리(?)를 좋아하는 가장 보통남으로서, 아쉬버.

정작, 여신의 품절 예고보다, 더 충공이었던 건 어떤 두 죽음.
힘들어요…한강 투신 19세 억척소녀, 문자로 보낸 마지막 외침
집창촌 떠나 발버둥, 가난에 짓눌려 다시…

연관성 없을 법한 이 두 기사의 두 죽음에서,
나는 자꾸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징후를 느낀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과 사회를 휘감고 있는 어떤 징후.

기사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일하며 힘겨이 삶을 지탱하던 열 아홉 소녀의 죽음.
사건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경찰은 이렇게 말했단다.  
"패밀리 레스토랑을 자주 찾는 가족이나 젊은 연인 단위의 손님들을 보면서 경제적 박탈감과 심리적 외로움 등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소녀가 그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말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단어로 그 죽음을 얘기하겠지만,
정말 그런가. 당신도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이른바, '청량리588'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서른 하나의 여인.
그녀에게 흉기를 들이댄 것으로 추정되는 50대 용의자(몽타주도 떴다.)는, 
그냥 대한민국의 한 남자일 뿐인가. 정말 그런가. 

패밀리레스토랑이 때론 나는 불편했다.
무릎까지 꿇고 손님에게 방긋방긋 하이톤으로 주문을 받는 태도가.
물론 그것은 무릎 꿇은 그들의 의지가 아닐 것이다.
그렇게 강요하는 억지와 굴욕이 나는 늘 불편하고 안스러웠다.
그 비싼 음식 앞에서 마냥 나는 행복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뭔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스친 이 책의 제목은.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이 책의 광고카피는 이렇다. "난 더 이상 버려지지 않아, 차라리 내가 세상을 버릴 거야.", 어쩌면, 어쩌면 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어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열 아홉 그 소녀와 메뉴를 주문한답시고 이야길 나눴을지도 모를 일.

한강에서 산산이 흩어진, 
그 열 아홉 소녀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패밀리레스토랑 등지에서 불안과 세상의 흉포함에 노출된 누군가를 스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스물은 물론 '스무살 이후'조차 거세당한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줄 수 있는,
못다핀 꽃 한송이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욱 스라린 것은 그 '사회적' 죽음 때문이다.
한강에 뛰어들거나, 대낮에 흉기에 찔려서야,  
이른바, '죽었기' 때문에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배제되고 외면 당한 존재.
그래, 어쩌면 잉여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존재.
로버트 저메키스의 <죽어야 사는 여자>는 21세기 한국에서, 
이렇게 변주되는 셈인가.

그들은,
정혜윤의 말마따나, 도시의 유령들이다.
잉여로서의 인간이며,
우리가 ‘우리는 안전하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기하고 거부하고 배제하고 외면한 인간들. 포함-배제의 게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노숙인의 죽음

우연하게, 그날 이후 신문과 방송, 즉 매스 미디어에서는,
김연아와 문근영이 복작복작.

평상시 같으면 오~ 나의 작은 여신님들이 또 나오셨네, 하며
퉁~ 치고 넘어갔겠지만, 자꾸 걸리적 거렸다.

김연아의 가창력이 어떻고, 이상형이 어떠하며, 여인의 향기 운운하며 셀카질에 대한 궁금하지도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널부러졌고,
(미국 LA시는 '김연아의 날'까지 제정한단다!)

문근영의 연극 출연을 전하면서, 역시나 철철 흘러넘쳤다.

연아와 근영의 이른바 '미친 존재감'과 맞물려,
열 아홉, 이름도 모르는 소녀,
서른 한 살,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냉대했을 여인,
그 죽어야 (존재감이) 사는 여자들이 가슴을 후벼판다.

석류가 인터뷰 기사에서 말한 태균이 간택 이유에서도 턱 걸렸다.   
"이렇게 반듯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면 결혼해서도 좋은 가장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도 좋아하신다."

오해는 마시라.
석류 여신의 이말을 비난하거나 폄하하자는 생각, 전혀 없다.
이건 누구나 충분히 가질 법한 생각이지 않은가.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이 글도 그래, 아마도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마 살아서도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거나 구원 받을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평생 그들은 그것을 꾸역꾸역 자신의 업보라고 여기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기 알량하게 이런 글을 쓰는 건,
"난 이런 문제에 그래도 관심이라도 가졌다"는 알리바이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설명하기 힘든,
이건 뭔가 징후일 것이다, 라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설명해 주면 더욱 좋을 테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사회에, 무심한 나를 비롯한 우리에게,
어쩔 것이냐, 따져묻는 것 밖에 없는데,
누구든 함께 따져물었으면 좋겠다.

왜 이 노래가 듣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노래를 계속 틀어대고 있다. 이 정도(양양). 


 
조만간, 열 아홉의 꽃이 산산이 흩어진 동작대교에 가 볼 생각이다.
그리고, 정은임. 누나라면 어떤 얘기를 했을까.
4일, 누나의 6주기다. 추모 바자회다.
누나는 아마 <정영음>을 통해 무언가 이야기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불씨를 틔웠을 것이다.

참, 진짜 여신이 이 땅에 잠시 강림하셨다. 
안젤리나 졸리. 

가족 만든다고 '여신'이라는 타이틀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결혼했다고 '여신' 타이틀이 없어진다면, 그건 짝퉁 여신이지.
졸리의 여신 포스는 '진짜'다.
뭣보다, 내가 '진짜'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녀는 이 세계를 걱정하고 행동에 옮길 줄 알기 때문이다.
아니 세계를 염려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여신이 아니다.
진짜 여신의 포스는 그런 것에서 나오는 법이다.
아무나, 개나소나, 여신이 될 순 없다.
아니, 여신보다 그냥 신이라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