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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털 싱글스토리

사랑은, '오렌지주스'에서 시작한다...

연말연시, 곧 덕담이 난무하는 시즌.
누구에게든, 상투구든 뭐든, 좋은 말 한마디씩은 던지는 것, 익숙하지. 전화, 문자, 대면 등을 통해 주고 받은 새해인사를 담자면, 누구나 트럭 백만스물두개 정도는 될 터. "복 받아라"는 클리셰가 가장 흔할 테고, 내 경우, 다음으로 많은 것은, "결혼해야지" 정도가 되시겠다! 뭐, 결혼 안(못)한 종족들의 피할 수 없는 덕담? 악담?

"올해는 결혼하냐?"
"좋은 소식 좀 듣자"
"올핸 국수 먹게 해주는 거냐?"
"새해 장가도 좀 가고..."
"새해엔 결혼해서 부모님을 즐겁게 해주는 한해가 되길 바란다. 사회적 어른!..."


뭐, 이런 말들이 우수수 쏟아지더군.
몇년째야, 대체.^^;; 이 말 건네는 사람들도 슬슬 지겨워질 때가 됐지 싶은데, 제일 만만한 덕담인가? 어쩌다, 결혼 못(안)한 처지가 안스럽다는 뉘앙스까지 은근 품은 말을 들을 땐, 아 그 측은지심에 눈물까지 킹왕짱 쏟아지려구 해. 또 부모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니.-.-; 그건 더 슬퍼. 꼭 부모를 위해 하는 결혼이라. 내 아무리 불효자라지만, 그건 너무해. ㅠ.ㅠ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 당연 아니지.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고, 당연 날 위해 건네는 진심이란 것, 알아~ 그럼에도, 그 말이 때론, 폭력적인 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줬음 좋겠어. 생을 사는데 있어서, 단 하나의 방식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끔찍한 일이야. 또 나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소수도 있음을 고려하면 더 좋지 않겠나 싶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꽂히면, 그 제도와 도킹하는 날도 있겠지. 그래도, '결혼' '장가' '시집'이라는 말보다 '사랑'이란 말을 하면 더 좋지 않을까. "결혼해라"는 말 대신, "사랑해라" 혹은 "더 많이 사랑해라"는 그런 말. "연애해라"도 좋겠군.

며칠 전, 현재 결혼 상태의 한 친구가 툭 던진 이말.
"넌 혼자여두 씩씩한 것 같아... 난 혼자여두 외롭고, 둘이어도 더 외로워지라..."
쓸쓸함이 묻어난, 그 자조섞인 얘기에, 난 뭐라고 해야 좋을지 잠깐 고민.
"어, 왜 이래. 난 외로움도 못느끼는 외계인이냐? 외로움은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거야. 친구처럼, 감기처럼 평생 옆에 달고 있어야 돼. 사람에게 숨길 수 없는 세가지가, 기침, 가난, 사랑이라는데, 난 거기다 외로움도 더 붙여야 한다고 생각해..."
뭐, 이런 시시껄렁한 말을 해줬다. 결혼도 못(안)한 '아해'의 망언?

사실, 나는 일찍 눈치챘다.
외롭지 않기 위해 결혼한다는 것, 순 말짱 거짓말이라는 걸. 단지 외로움을 떨치려고 하는 결혼이라면, 물론 나는 자격따윈 없지만, 그 결혼 반대닷. 그런 사람은 그 외로움의 실체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의, 감정의, 빈 공간을, 한갖 제도로 편입함으로써, 메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오산인게지. 그럴 때 하는 결혼일수록, 허물어지기 쉬운 모래성이 될 것 같고.

나는, 그 친구에게 "사랑해라"고 말해줬어.
그 사랑의 대상이 누구일지는, 온전히 그의 몫이지만, 나는 좀더 그가 '아름다운 개인'이 돼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봐. 경험상, 외로움은 떨치는 것이 아니더라구. 그리고 떨친다고 되디? 그것이. 그놈, 킹왕짱 질긴 놈이야. 아싸리, 친구가 되는게 상책이더라규. 뭐랄까. 외로움과 좀더 친해질 때, 사랑도 더 잘할 수 있는 법이고, 아름다운 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사랑의 대상이, 스스로가 돼도 좋겠어. '싱글'은, 때론 결혼 혹은 연인 여부와는 무관한 레떼르일 수도 있는데,

그리하여,
'싱글'에게 고하노니, 올해 사랑하시라. 이것이 너에게 건네는, 나의 첫 새해덕담이노니.

그리고, 이건 내가 아는 한 사랑의 시작. 바로, <노팅힐>. 너에게 권해줄께.
우리 올해, 오렌지주스나 실컷 마시자규.ㅎㅎㅎ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각해봐. 사랑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 나? 어디를 사랑의 시작으로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저런. 하긴, 애매할거야. 누가 그랬잖아.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어. 사랑의 시작을 두부 자르듯, '이 순간이었어'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래도, 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오렌지주스에서 시작된 사랑. 사랑은 때론, 그렇게 엉뚱해.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된 거지. 하하.

짜잔, '미국 할리우드의 대스타,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등장하지. 
꺄아아~ 줄리아 로버츠, 소리치고 싶지? 재밌는 건, 극중 안나가 바로 줄리아 로버츠, 그 자체야. 할리우드 스타가 할리우드 스타 역할을 하는 시츄에이션. 그렇담 상대는? '영국 노팅힐의 구멍가게 책방주인, 윌리엄'(휴 그랜트)이야. 전혀 매칭이 안 된다구? 그렇지. 이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은 당연해. 더구나 로맨스라니! 그야말로 꿈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 허구(로 밖에 생각될 뿐이)지. 

그런데, 이 이야기, 그런 선입견 버려도 좋아. 
제목이기도 한 작은 마을 '노팅힐'이 큰 역할을 하지. 뭐랄까.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엮어지는 장소로 최적이었어. 거대도시를 대변하는 안나는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반면, 지리멸렬함과 팍팍함, 그리고 외로움을 품고 있어. 도시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의 환상마냥, 안나도 대도시를 떠나 작고 소박하지만 따스함이 살아 숨쉬는 안식처를 꿈꿔. 이미 길들여진 거대도시를 영원히 떠나 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반면, 여행관련 서적만을 다루는 책방주인, 
윌리엄은 '헐랭이'라는 별명답게 별 볼일 없는 남자야. 해리슨 포드와 닮은 건달과 도망간 아내와는 이혼했고, 사랑했던 여자는 친구와 결혼한데다, 서점은 파리만 들끓고. 점원마저 월급만 축 내는 빈대지. 나른한 시골 동네의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 근데, 이거 진짜 게임이 될까. 

그런데 그 노팅힐엔 평범하고 소박한 삶의 풍경이 가득해. 
한마디로 포근하지. 시골 변두리의 다소 번잡한 시장과 잘 어울리는 주변 풍경은 절로 미소를 띄우게끔 유도하고. 가슴(감성)보다 머리(이성)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겐, 소박한 도시의 여유가 게으름으로, 관심은 간섭으로 치환되곤 하잖아. 가슴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잊어가는 사람살이는 속도전과 무한경쟁이란 명목으로 마음의 감옥을 쌓고 말이야. 그런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곳, 노팅힐. 모름지기, 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의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로 적절치 않겠어? 꽉 짜여진 메트로폴리탄의 일상에선 길어올리기 힘든, 사랑의 어떤 시작. 

해방과 자유를 꾀하는 안나가, 결국 일을 벌려. 
그건 바로 '탈출'. 시골마을의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겠지. 윌리엄의 책방을 찾고, 다시 골목에서 그들이 부딪혔는데, 아뿔싸, 오렌지주스가 쏟아지네. 안나의 옷에 젖은 오렌지주스는 결국, 사랑에 젖게 만드는 촉매제! 이름하여, '오렌지주스 로맨스', 무척이나 맛있는 과즙음료를 넘기는 순간이야. 꿀꺽. 캬~

그리고, 두 사람의 낭만적인 사랑의 매개물은 윌리엄의 친구들이야. 
(신분상) 너무 다른 두 사람이지만 함께 있으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것도, 이들의 살가운 주책과 한없는 간섭·푸념이 한몫하지. 삶에 대한 낙관과 곰살 맞은 속삭임이 일상사를 가꾸는 순간.

하긴 주변 친구들, 나름대로 사연, 많지~
윌리엄의 여동생은 빈둥대면서 시집 못 간 신세타령이나 하고, 윌리엄과 함께 사는 친구는 괴상한 옷을 입고 말썽이나 부리는 돌아이야. 불의를 사고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자 불임까지 된 윌리엄의 옛사랑과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 또 투자를 제대로 못해 회사 퇴출을 겁내면서 무기력하게 살거나 파리만 날리는 음식점의 주인이 된 친구 등. 윌리엄의 주변은 낙오자들로 가득해.  

그러나 그들은 지지리궁상이 아니야. 
'누가 더 비관적인 인생인가'로 시합을 벌이는 오십보백보의 사람살이지만 그들의 회합은 언제나 웃음과 따스함이 앞선다고.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은근하게 깔린 그들의 우정과 사랑은 윌리엄의 혼란스러운 사랑이 방점을 찍게끔 모든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아. 이런 그들의 풍경에 녹아들지 않을 재간은 없지. 

<노팅힐>, 남자신데렐라나 바보온달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냐.
평범하게 꾸미는 인간적인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드러낸다구. 운명임을 강조하지도 않아. 자연스런 감정을 투영하면서 사랑의 장애물을 넘는 과정도 과장되지 않고. 오렌지주스에서 시작된 그들의 로맨스는, 몇 번의 헤어짐에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득실을 따지지 않는 감정에 충실하게끔 진행되더라. 

그렇다면, 그 오렌지주스에서 시작된 사랑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지?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던 윌리엄의 바뀐 마음을, 기자회견장에서 확인하는 안나. 그녀가 내뱉는 'indefinitely(정해져 있지 않은, 영원한)'란 대답은 관객 마음에 묘한 공명을 불러일으켜.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로맨틱코미디의 힘은 의외로 강하다구. 정형화된 경로의 나열과 인위성이나 우연의 반복 등이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다양한 변주로 그것을 극복하기도 하지.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촉촉한 비처럼, 관객들 가슴에 달콤쌈싸름한 사랑의 감정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로맨틱코미디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이 영화, 어쩌면, 
'사랑이란…아주 소박한 꿈'같은 것임을 주지시켜줘. 배경인 영국의 작은 소도시인 '노팅힐'의 공기와 유머는 이와 '딱' 어울렸고. 

그래서, 
<노팅힐>은 꽤나 재치있고 상큼한 로맨틱코미디였어. 그리고 너무도 사랑스럽고 한번쯤 꿈꿔 왔음 직한 이야기를 재현했어. 환상 같은 사랑의 그림이 태연자약(!)하지만 굴곡 많게끔 흐르고. 굳이 현실성을 따지려 들 필요는 없어. 극중 안나가 윌리엄에게 말하는 "황당해도 즐거웠어요"라는 말이 영화를 대변하는 평인지도 모르지. 

함께 마실까? 이 맛있는 오렌지주스 로맨스!!!
오렌지주스 마시다보면, 안나처럼 환상의 여인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어쨌든, 그 사랑의 끝은 묻지마. 나도 몰라. 사랑의 시작은 우리가 훔쳐볼 수 있었지만, 끝은 온전히 두 사람의 것이야. 직접 물어보거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 

혹시, 오렌지주스가 성공적이었다면, 알려줘. 
나두, 앞으로 그 오렌지주스만 마실래. 혼자만 재미보고 입닫기 없기닷.

그건 그렇고, 'She~'(Elvis Costello) 너무 좋지 않아? 이 노래, 들을 때마다 노팅힐의 영상이 눈 앞에서 줄줄줄 흘러내린다구. 영화도 그렇지. 씨봉, 첨 볼 때부터 그리 눈물과 웃음 범벅되게 하더니, 어찌 다시 되돌려 볼 때마다, 똑같은 현상을 불러일으키다니. 아, 씨봉. 글고 줄리아 로버츠의 1538만달러짜리 미소, 나의 여신은 역시 죽지 않아. 늙지 않아. 언젠가 필름 속을 걷게 된다면, '노팅힐'에 꼭 가볼래. 어때, 같이 갈까? 오렌지주스나 실컷 마시고 오자구. 혹시 알아. 줄리아 로버츠 같은 연인과 멋진 사랑에 빠질지...

She may be the face I can't forget
a trace of pleasure or regret
may be my treasure or the price I have to pay
She may be the song that summer sings
may be the chill that autumn brings
may be a hundred different things within the measure of a day.
She may be the beauty or the beast
may be the famine or the feast
may turn each day into a heaven or a hell
She may be the mirror of my dreams
a smile reflected in a stream
She may not be what she may seem inside her shell
She who always seems so happy in a crowd
whose eyes can be so private and so proud
no one's allowed to see them when they cry
She may be the love that cannot hope to last
may come to me from shadows of the past 
that I'll remember till the day I die
She may be the reason I survive
the why and wherefore I'm alive
the one I'll care for through the rough and ready years
Me I'll take her laughter and her tears and make them all my souvenirs
for where she goes I've got to be
The meaning of my life is she, s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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