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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선구자, 마가렛 생거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선구자, 마가렛 생거(Margaret Sanger)
(1883.9.14~1966.9.6)
아이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 여성의 몸을 해방하라!!


여성의 몸은 당연히 여성 자신의 것입니다.
피임은 여성 자신의 몸을 통제, 출산력을 조정할 수 있는 권리이며,
세계보건기구(WHO),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에서도 생식의 권리, 원하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지 않을 권리, 피임선택권의 보장을 강조하고 있죠.

그런데 우습게도, 이런 당연한 논리나 원칙이 통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회나 가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생산과 육아를 통제하고,
이상하고 해괴망측한 의무 혹은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여성의 몸은 온전히 여성의 것이 아니었던 거죠.
자녀 생산과 육아를 위해 여성의 몸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코미디 같은 시대.

그런 시절에, 이런 주장을 펼친 여성이 있었습니다. "여성은 스스로 자기 육체의 완전한 주인이 되어야 하고, 원하는 아이가 축복 속에서 태어나야 한다."
그는, 마가렛 생거입니다.
여성의 피임할 권리와 인간의 권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
그의 노력이, 여성의 몸을 여성에게 돌려준 것이 아닐까도 싶어요. 


마가렛의 사회운동가로서의 기질은 일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급진적 자유주의자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지성과 예술적 자질을 갖추고 위트와 매력이 넘친 아버지를 닮은 까닭인지,
그는 호기심이 많고 연애와 파티를 즐기는 한편,
토론과 논의·대화를 좋아했으며,
학교에서는 리더역할을 맡은 활달한 학생이었습니다.
반면 가톨릭 신자로 자상하고 가정적이었던 어머니에게선,
가정의 소중함을 새긴 듯 싶어요.
그의 집안에는 무려 11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가 16살 되던 해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어려서부터 여성의 자신의 몸에 대한 주인일 수 없는 현실을 접했던 마가렛은,
아버지와의 다툼으로 잠시 집을 나가면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던 그는,
간호사가 좀더 보람되고 만족한 삶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나 봐요.
그리고 생각대로 간호사는 흥분과 극적인 사건들로 충만해 있었고,
1900년 건축기사인 윌리엄 생거와 결혼했고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다 몸이 쇠약해져 시골 요양원에서 있었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활달한 마가렛의 성정에 안정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는지,
뉴욕에 다시 돌아와 간호사일과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상태가 나아졌다죠.
남편과 함께 노동운동가 빌 헤이우드,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기자 존 리드, 작가 업톤 싱클레어 등의 진보주의자들이 펼친 토론의 장에 참석했고,
당시 노동운동에도 적극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마가렛은 그 사회변혁운동에 여성들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트럭운전사의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려다 제대로 된 방법이 없는 통에 사망하자, 이에 깊은 슬픔을 품었던 그는 산아제한 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됩니다.
물론 산아제한을 여성의 인권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시도였던 거고요.
1916년 에델 바이네, 페니아 민델과 함께,
브룩클린에 산아제한상담소를 최초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당시 이는 불법이었어요. 1873년에 제정된 컴스톡법은 산아제한에 대한 어떤 정보도 유포할 수 없도록 하고 있었죠.
이 상담소는 십 여일 후 강제로 폐쇄 당했고, 30일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마가렛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불편부당한 현실 때문에라도.
19세기에 이미 피임기구와 피임약이 발명되고,
산업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대한 대책(피임 등)이 강구되긴 했으나, 이는 유한계급에 한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은 소외됐던 현실.
가난한 집은 성교육은커녕 아이를 임신하면 무조건 낳아야만 했어요. 반면 부잣집은 성교육은 물론 피임법도 배우는 등 돈과 힘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죠.
그는 잡지 등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억제할 권리, 즉 생명을 생성시키거나 그 생성을 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답게 살기 위해선, 노동자 스스로가 '아이 낳기'를 결정해야 하고, 피임법을 가르쳐 주는 일은 '부도덕한 일'이 아니며,
그것을 '불법'으로 못 박는 법이야말로 '나쁜 법'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신념은 그랬습니다. 사람답게 살 권리, 여성답게 살 권리, 어머니가 될 권리, 아이답게 살아갈 권리 등은,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물론 이런 마가렛의 외침은 당대 주류로부터 생뚱맞은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 주정부와 검찰과 경찰 등의 권력은 그에게, '미친년' '마녀' '악마' '여성해방을 뒷걸음치게 하는 못된 년' 등의 악담을 퍼부어댔고요.

이 같은 갖은 탄압이 있었지만, 마가렛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되죠.
1921년 미국산아제한연맹이 만들어졌고,
2년 후엔 직접 '산아제한 의료연구소'를 설립해 피임보급에 나섰습니다.또 1927년 제1차 세계인구문제회의(제네바)에선 국제산아제한기구가 최초 결성됐어요.
이즈음 보수적이던 의학계도 의사에게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의사법'입법안 통과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1939년 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죠.
2년 후 마가렛과 미국가족계획협회는 새로운 피임법을 개발하고 피임약을 보급하는데도 힘을 쏟게 됩니다.


다만 빈곤과 다산이 모자 사망률을 높이고,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산아제한 필요성을 강조했던 마가렛도, 가족계획운동으로의 변화과정에서 후진국의 빈곤 원인을 인구문제로 단순 치환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가 노동자 윌리엄 생거와 이혼하고 부호와 결혼한 뒤,
어느 정도 보수화된 탓이 아닐까하는 분석도 있어요.
미국가족계획협회는 1960년대 낙태법 수정안이 사회문제화하자 반대편에 서기도 했어요. 통치이념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마가렛의 초창기 운동성 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피임조차 마음대로 못하고 여성의 몸이 억압받던 암흑기를 뚫었던 것도,
피임 등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도,
마가렛 생거의 확고한 신념과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어요.

누군가는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일류 역사상 남자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여자이며, 살아생전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참고자료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마가렛 생거의 이유있는 반항』(버지니아 코니 지음/안정숙 옮김/형성사 펴냄), 『20세기 사람들』(한겨레신문 문화부 지음/한겨레신문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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