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프랑스혁명의 배후, 잔 마리 플리퐁(롤랑)

프랑스혁명의 배후, 잔 마리 플리퐁(롤랑)(Jeanne-Marie Phlipon)
(1754.3.17~1793.11.8)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 속 단두대에 스러진 급진주의자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절대주의 왕정을 폐기하고 개인(시민)의 권리를 고양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민주권론 등이 혁명의 기초가 됐으며,
인간의 자유․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와 인권선언 등을 명시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을 다진 일대 사건이었죠.

이 혁명의 대열에 적극 동참했던 이 사람, 잔 마리 플리퐁(별칭 마농 플리퐁).
그는 프랑스혁명의 한 주역이자 실세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제판공 아버지를 둔 덕에, 다양한 책과 사상을 접하면서 자랐어요.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18세기 철학자․사상가들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죠.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는 1780년 리옹의 산업검찰관이었던,
훗날 혁명기에 내무장관을 지낸 장 마리 롤랑과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동지였으며, 혁명이 터지자 정치운동에 적극 가담합니다.

정치에 강력한 집념을 가졌던 플리퐁은 당초 급진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자코뱅당 지도자이자 파리코뮌 대표로 추대됐던 로베스피에르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상적 교류를 했었죠. 혁명 전반기 입법의회 좌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의 차이 등으로 로베스피에르와 멀어지게 되고,
1791년 자코뱅당에서 떨어져 나온 온건 부르지아 민주주의자들(훗날 지롱드당이라 불린)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는 이때,
자신의 집을 이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면서 자연히 살롱을 열게 됐지요.

혁명의 중반기까지 지롱드당은 혁명을 주도했고,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1792년 롤랑이 내무부 장관이 됐는데,
플리퐁은 남편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정도로 실세였다죠.
그의 살롱은 흡사 지롱드 당의 사령실이나 다름없었고,
"장관은 롤랑 부인(플리퐁)이지 롤랑 자신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플리퐁은 롤랑이 국왕에게 보낸 항의문의 초안을 썼는데,
결국 이 문서 때문에 롤랑은 1792년 6월 내무장관직에서 해임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남편을 부추겨 1792년 9월 소집된 혁명입법기구인 국민공회에서,
온건 민주주의자 조르주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공격했습니다.
지롱드당과 자코뱅당 사이의 틈은 점점 커졌습니다.

혁명이 진전되면서 급진적인 경향도 커졌습니다.
1793년 자코뱅당의 주장이 관철돼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플리퐁과 롤랑은 반산악파(反山岳派) 입장을 표명했는데,
자코뱅당이 실권을 잡으면서 지롱드당이 의회에서 축출되고 공포정치가 시작됐습니다.

결국 플리퐁도 같은 해 5월 자코뱅 당원들에게 체포돼,
11월에 단두대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단두대에 오르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죠.
"오, 자유여, 너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는가."
노르망디로 피신 중이던 그의 남편은,
플리퐁의 처형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네요.
아내의 후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최후였을까요.

플리퐁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고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가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이나 재기는,
당시의 시민혁명을 추동한 하나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참고자료 : 『뉴턴에서 조지 오웰까지』(윌리엄 L.랭어 지음/박상익 번역/푸른역사 펴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위민넷 - 키위, 여성을 말하다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