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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비극, 마리 앙투아네트

때를 놓쳤더니, 아직 못봤는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마리 앙투아네트>.
언젠가 봐야할 목록에만 올려놓고, 아직 못보고 있군. 쩝.
논쟁 심하고 호오가 확연히 갈리는 건 차치하고,
내가 그저 보고픈 건,
소피아가 해석하고, 커스틴 던스트가 체화한 앙투아네트라기보다는,
도저하게 감싸고 돌고 있을 어떤 핑크빛 향락.


그리고 명심할 것.
어떤 확인되지 않은 루머나 얼토당토 않은 허구가,
당사자의 마음에 낼 커다란 생채기.
왕비라는 이유만으로,
셀러브리티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혼자 삭혀야 할 의무는 없는 법.
악성 루머나 댓글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그 악루나 악플을 소화하는 우리의 자세나 태도가 문제지.
그것으로 빚어진 특정 이미지 때문에 한 사람을 해할 수도 있는 법.

어쩌면, 우리(대중)는 늘 그런가봐.
18세기나 21세기나 별다를 게 없는 것이,
한 시대의 아이콘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

어쨌든, 나도 뒤늦게 알았지만,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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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비극,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11.2 ~ 1793.10.16)


퀴즈하나 내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장미는?
어떤 대답을 하셨나요.
그런데 틀림없이, 이 장미, 빠지지 않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미.
동명의 만화로도 엄청 유명하죠. 특히나 소녀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낸 작품입니다.
알다시피, 이 작품, 파리 외곽 베르사유에 위치한 왕궁을 배경으로 한 상상의 이야기입니다.
오스칼이라는 걸출한 상상의 캐릭터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가 1682년 파리에서 거처를 옮기면서,
프랑스 앙상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
무엇보다 궁전 내 깊숙이 위치한 '마리 앙투아네트 영토'로 유명하죠.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영토에서 앙투아네트는 세간의 시선과 달리,
소, 말 등을 기르며 가끔은 직접 우유를 짜며 전원생활을 꿈꿨습니다.
지금도 이 농장에선 말, 돼지, 염소, 당나귀, 개, 닭, 오리, 토끼 등을 관찰하고 직접 만나볼 수도 있다고 하네요.

 
맞아요. 오늘, 이 사람이에요.
마리 앙투아네트.
10월16일, 1793년 기요틴(단두대)에서 꺾이고 만 베르사유의 장미.
오스트리아 명문 합스부르크가의 황녀로 태어나 프랑스의 왕비로 생을 마감한 여인.
여기에 덧붙여, 그에 대해 대중적으로 각인된 이미지를 나타내자면,
엄청난 허영과 사치의 대명사.
부당한 정치 간섭과 욕정과 욕망의 화신으로 각인된 팜므 파탈.
몇 명의 연인을 두고 성적 방종을 일삼은 암캐.
프랑스혁명의 원인으로 지목된 마녀 등등. 


그런데 정말,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런 수식어에만 가둬도 될까요.

우선 그에 대한 하나의 오해부터 풀죠.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했다는 이말.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이건 일종의, 악성 댓글(루머)입니다. 과격한 혁명자들이 자신의 목적을 추동하려고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여행≫저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를 비롯한, 역사학자들 대부분은 그것이 일종의 유언비어였다는 학설을 강하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앙투아네트는 실제, 백성을 생각하고 정치에 관심 많은 왕비였다네요.
프랑스 왕가 중 소작인의 옥수수밭을 마차로 짓밟고 지나가기를 거부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루이16세가 사냥 때, 오발로 맞은 농부를 농부의 집에서 3일 동안 간호하기도 했습니다.
또 자신의 일기에는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들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왕은 이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대관식 날을 평생(제가 100년을 산다 하더라도) 잊지 못할 겁니다."
비극은, 저 유언비어가 앙투아네트를 언급할 때마다 언급되고 영원히 떠날 리가 없다는 것.

앙투아네트는 일전에 언급했던 마리아 카톨리나의 친동생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의 15번째 자녀.
그런 환경에서 교양을 취득하고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는,
당시 프로이센의 위협에 따른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강화하려는 가문의 요구에 따라 14세에 루이 오귀스트(나중의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하고 프랑스의 왕태자비가 됩니다.
이후 루이 15세의 사망 후인 1774년 왕비가 됐는데,
그는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관(館)에서 살면서, 사교·관극·수렵·미술·음악 등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들 사이에서 '작은 요정(妖精)'라고 불렸습니다.
또 그는 통설과 달리 기품과 우아함을 갖추고, 아름다운 프랑스 언어를 구사했으며,
모든 귀족 부인들이 닮고 싶어 하던 왕비였다고 전해집니다.
남편 문제로 7년 동안 아이를 못 낳다가, 치료를 받아 4명의 자녀를 가진 그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어머니였어요. 특히 셋째 아들이 천식으로 고생하자 지극정성으로 이를 보살폈다지요.

당시 프랑스 왕실의 사치는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앙투아네트가 유독 낭비를 일삼은 왕비였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왕실 전반에 걸친 일상이었죠.
다만 루이 16세가 유독 검소했던 탓에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죠.
아울러 1785년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그의 위신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입수하려 한 사기이자 음모였는데,
로앙 추기경이 엮인 데다 마리 앙투아네트로 변장한 창녀로 인해 왕실이 추문에 휩싸였죠.
그는 사건에 개입하지도 않았고, 철저히 이용만 당한 셈이었지만,
세계는 때론 그렇죠.
악성 허구나 루머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공력을 집중하는 순간이 있지요.
그 때라고 지금과 다르지 않아요. 데자뷰(기시감)라고나 할까요.
허무맹랑한 루머가 대중들에게 하나의 사실이나 진실처럼 오도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세계에 발붙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집니다.
목걸이 사건이 종결됐음에도, 그를 조롱․비방하는 글, 노래, 인쇄물 등은 대중적으로 성공했지요. 이런 중상 비방문들은 허구를 사실로 바꾸면서 신화를 구축하는 마법을 발휘하죠.

결국,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대중들은 화가 났고,
왕정에 대한 분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발화됐습니다.
앙투아네트의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그를 버리고 망명을 갔지만,
그를 비롯한 왕족들은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돼 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그는 퇴영적이고 선량한 남편을 격려하고 자신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청하는 등 왕권의 복권을 위해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윽고 탈출 시도를 했으나 이내 잡혔고,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면서, 사태는 악화됐습니다.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루머가 퍼진 겁니다.
마침내 8월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의 습격으로 국왕 일가는 탕플탑에 유폐됐고,
이듬해 1월 루이 16세가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10월16일, 국고를 낭비하고 오스트리아와 공모해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시민의식의 성장과 구제도의 모순이 결합해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필연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왕실이나 앙투아네트는 필요 이상의 모함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개인으로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물론 역사란, 개인의 사정을 일일이 감안하지는 않는 법이지만요.
그것이 혁명의 추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지만, 
앙투아네트가 겪어야 했던 이미지의 실추, 잔인한 비극은,
후세에도 그가 폄하된 왕비로 남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요인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떤 시선은 그를 프랑스대혁명의 희생양으로 보기도 하지요.

어쨌든, 저는 그래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랑을 갈구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요.
누구나가 그렇듯 욕망에 충실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욕망의 화신은 아니었으며,
낭비벽으로 사치스럽고 무뇌아적인 여인으로 그를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혁명의 창녀도 아니었지만,
역사의 거대한 물결 앞에 그저 살아보고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여기서 우리, 사실로 밝혀지지 않은 루머나 이야기에 대해서 너무 왈가왈부하지 말아요.
18세기에도 허구가 사람을 잡았는데, 21세기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건,
정말 세계의 비극이네요. 좀 덜 슬픈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세계가...

(※ 참고자료 : 위키백과, 두산대백과사전,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Marie Antoinette, the portrait of an average woman』(슈테판 츠바이크 지음|박광자 외 번역/ 청미래 펴냄),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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