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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발 딛고 있는/위민넷

불황을 위무한 작가의 힘, 마가렛 미첼

불황을 위무한 작가의 힘, 마가렛 미첼
(Margaret Munnerlyn Mitchell, 1900.11.8~1949.8.16)



스칼렛 오하라, 레트 버틀러, 비비안 리, 클라크 게이블, 남북전쟁,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이만하면, 머리에 떠오르는 것, 있으시죠?
딩동~♪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맞추셨네요.
소설이든, 영화든, 아니면 다른 통로를 통해서든,
쉽게 잊혀 지지 않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자칫했으면 이 작품과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처음엔 어느 누구도, 1037페이지 분량의 이 작품을 출판하려 들지 않았거든요.
이 거대한 대서사시를 잉태한 작가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었나 봐요.
때는 바야흐로,
1929년 대공황 발발 이후 불황의 만성화로 침체기에 있던 1930년대.

모두가 위험을 회피하려는 시기,
작가 지망생의 책을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죠.

그렇다고 힘들게 원고를 집필한 마가렛 미첼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원고 뭉치를 들고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전전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친 원고도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 질 정도였다죠.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인연은 우연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법.
미첼이 살던 애틀랜타의 지방신문에 이런 단신이 실렸습니다.
"뉴욕 맥밀란 출판사 사장 레이슨이 애틀랜타에 왔다가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
기차역으로 바람처럼 달려가는 미첼.
다행히도 레이슨이 탄 기차가 떠나기 전이었고,
기차에 오르던 그를 잡고 말합니다.

"제가 쓴 소설입니다. 한 번만 읽어주세요. 읽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바람과 함께 사라질 뻔한 레이슨을 만났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 같던 소설이 바로 구원받았냐고요?

천만에, 아직 진행 중입니다.
결말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미첼의 끈질긴 구애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자, 다시 기차 안으로 들어가 보죠. 
볼 일 마치고, 돌아가는 피곤한 여정,
그 엄청난 페이지의 원고에 쉽게 눈이 가겠습니까.

레이슨은 어쩌다 원고를 받긴 했지만,
선반 한 켠에 이를 던져놓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기차를 타고 두 시간가량 지난 즈음,
승무원이 전보 한 장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레이슨 사장님, 원고 읽어보셨어요? 아직 안 읽으셨다면 첫 페이지라도 읽어주세요."
잠시 놀랐지만, 원고를 힐긋 쳐다보기만 했을 뿐, 역시나 관심 밖.
다시 뉴욕을 향해 시간과 기차가 흐를 즈음,
같은 내용의 전보가 그의 손에 놓이고,

그때도 시큰둥했으나, 다시 세 번째 전보가 도달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요. 귀찮아서 꿈쩍도 않던 그의 마음이 슬쩍 움직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았길래 이토록 끈질기게 야단법석을 떨지?'
마침내 원고에 손을 갖다 댄 레이슨.
헉, 레이슨은 눈을 떼지 못하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고,
기차가 뉴욕에 도착, 다른 사람이 짐을 내릴 때도 그는 섣불리 일어나질 못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세상과 만나게 된 시발점은 이랬습니다.

또한 그렇습니다.
미첼은 원고를 레이슨에게 건네고는 그냥 집으로 가지 않았던 거죠.

우체국으로 향한 그는 거기에 머물며 시차를 두고 전보를 발송한 겁니다.
그의 열정과 끈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세기의 명작을 전파한 셈이랄까요.
레이슨은 작품에 감동 먹었고,
맥밀란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자신 있었나 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000달러의 선전비를 들여 초판 2만5000부를 찍었는데,
1936년 출판 첫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100만부 이상 독자와 만난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서평. "미국 소설 가운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와 가독성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 그야말로 최상급 소설이다."

또 이듬해는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지금도 해마다 20만 부 이상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됐죠.

아울러 세계 60여 개국 언어로 번역이 돼 국제적인 소설로 명성을 날렸고,
영화로도 제작돼 작품상을 비롯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동시에 엄청난 흥행과 영향력을 보여줬지요.
한편으로 당시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였을 정도로,

소설과 영화의 인기는 대단함 그 자체였답니다. 
기차역에서의 그 짧은 인연이 만든 이 엄청난 파급효과. 
어쩌면 생의 한 순간, 병적인 유머센스가 발현된 것이 아닐까도 싶어요.


그렇다면, 그토록 강한 열정과 끈기를 지닌 미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변호사이자 역사학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으로 참전한 외할아버지의 영향 등으로 남북전쟁에 대한 일화를 들으면서 성장했지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 남북전쟁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죠?

물론 집필을 위해 장시일에 걸친 방대한 자료 수집 또한 뒤따랐다고 하네요. 

미첼은 당초 의학을 지망해 매사추세츠주의 스미스칼리지에 들어갔지만,  
어머니 사망으로 귀향하면서 학교를 접었고,
몇 해 동안 애틀랜타 저널에서 5년 여 동안을 기자로 일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던 여성상에서 약간은 이탈하고자 했던 기질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1925년 광고대행업자인 존 로버트 마쉬(John Robert Marsh)와 결혼한 그는, 이듬해 발목을 다쳐 요양하는 동안, 남북전쟁과 재건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집필 과정에 숨은 공헌자(조력자)도 있어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영감을 주고,
당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제한적인 활동이 불가피한 상황이 불러온 것도 있지만,
그의 문필과 필력을 칭찬하고 어려서부터 듣던 남북전쟁 전후의 이야기를 작품화할 것을 독려했던 그의 남편, 마쉬.
칭찬과 격려의 힘 또한 이 소설의 잉태에 무시하지 못할 힘을 발한 것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미첼에게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단 한편이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첫 작품에 너무 많은 공력을 쏟아 부은 탓인지,
첫 작품의 엄청난 성공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직후, 이렇게 토로하고 맹세했다죠.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것 같다.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다."
150㎝의 단아한 체구로 위대한 스토리텔링의 흥미와 호소력을 보여줬던 그는,
1949년 그의 동반자, 마쉬와 함께 길을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불황이 태양을 없앤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피폐해진 사람과 시대를 위로․위무하고 평정심을 유지하게끔 도와줬습니다.
당시 이 책의 선전 문구도 힘겨운 시절을 반영하듯,
"단 돈 3달러로 완벽한 휴가를."이었다죠.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무엇보다 결정적 이 한마디 혹은 장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모든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폐허에서,
스칼렛이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흙을 쥐고서 읊조린,
절망에서 건져 올린 희망의 한 조각.

(당초 미첼이 붙인 제목이 바로 이 대사였는데, 출판사에서 당시 '내일(Tomorrow)'이란 말을 붙인 책 제목이 많다는 이유로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됐고, 주인공 이름도 당초엔 팬시 오하라였다가 출판사가 스칼렛 오하라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어요.)
 
모름지기, 작가는 그렇지 않을까요.
평화와 호황 때보다 불황과 절망의 시절에 더욱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마가렛 미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 그렇다면 혹시 레이슨 사장과 마쉬도 필요할까요?

아참 며칠 후, 8일이면 미첼의 탄생 108주년인데요,
오랜만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요.
당신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참고자료 : 위키백과, 완주신문, 『세계 영화계를 흔든 100대 사건』(이경기 지음/우리 문학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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