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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털 싱글스토리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 살아있으니 가능한 프러포즈

최근, 잇따라 접한 '아버지의 죽음'. 
약간 지나서 알았는데, 마음으로 늘 응원하는 사람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 마음이 덜거덕거려서 바로 메일을 보냈다. 글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 씩씩하게 여전히 일상을 버티고 있겠지만, 어느 불꺼진 공간에서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안간힘 같은 것으로 이전과 이후가 명백하게 균열을 보이고 있을 아버지의 죽음을 견디고 있을 그 사람. 이런저런 성향이 달라 마찰도 빚었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훌쩍 떠난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제(27일) 고등학교 동창놈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불쑥 일상으로 틈입한 비보. 녀석에게도 그랬겠지만, 내게도 그랬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라고 했다. 당일 내려갈 수 없는 상황(하긴, 그런 상황이라는 것도 죽음앞에선 우습다! 비겁한 변명이다.)이어서 어제 내려갔다. 아버님 영정을 보는 순간, 좀 멍해졌다.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20여 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뵀던 생전의 아버님이었다. 그 아버님이 영정속에 계신다는 사실이 금세 믿기질 않았다. 그리고 그 아버님과 똑같은, 아마도 아버님의 젊은 시절이었을 동창녀석이 서 있었다. 오늘 발인을 했고, 녀석은 지금쯤 before와 after가 다른 시간 속에 있으리라. 2011년 4월27일, 녀석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그렇게 접한 '아버지의 죽음' 앞, 나는 두 세계의 명멸을 생각했다. 
아버님 각각 이름으로 구축됐을 세계. 살아계셨던 시간만큼 이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았을 두 세계가 불을 껐다. 두 세계의 죽음 앞세, 하물며 이별 앞에서도 멈춰야 할 세계는 조의를 표했을까.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두 분은 산산이 흩어졌다. 남은 세계가 그 세계의 뒤를 잇는다.   

신문을 편다.
꼭 살펴 보는 면이 있다. 궂긴 소식, 즉 부고란. <클로저>의 댄(주드 로)은 부고담당기자다. 부고'전문'이 아니라, 부고'담당'이다. 한 세계의 소멸을 다루는데, 어떻게 '전문'이라고 붙일 수 있겠나. 부고를 전담한다해도 '전문'이 되는 것은 불가하다. 나도 기자 시절, '부고담당기자'가 되고 싶었다. 다른 어떤 사건·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넓고 깊을 한 세계를 다루고 싶었다. 물론 온전하고 완벽하게 그 세계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게라도 '잘 비워낸 한 생애'에 대한 예의와 경이를 담아 가시는 길에 놓아드리고 싶었다. 허투루 그 삶을, 세계를 다루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보면서 나는 어설프게,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이름에서 풍기는 생을 멋대로 상상하기도 한다.

허나, 부고란을 보면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신문 부고란에 나오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신문사에 그것을 알리는 경우인데, 알리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문에 이름이라도 올릴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특히 직업적으로(혹은 회사가) 화폐 혹은 권력에 밀접하거나 했던 장본인이거나 자제를 둔 경우가 많다. 삐딱하게 시부렁거리자면, 잘난 사람들의 (초상)잔치다. 이런 사람이 상을 당했으니, 어여 가 보시오, 하는 신호랄까. 부고란을 보면서, 나는 꼭 직업과 회사명을 적어야하는지, 궁금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또 하나 불만인 것은 또 다른 신문에는 누구누구의 모친, 부친으로 먼저 명명이 되는데, 그 이름 자체의 생과 죽음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물론, 부고란에 이름 올라간 것이 죄는 아니고,
외려 거기에 올라가지 못한 이름을 나는 상상한다. 역시 누군가의 죽음이 될 터인데, 신문에 이름을 올리진 못하지만, 그 죽음이 신문에 올라간 죽음보다 중요하지 않게 취급될 이유는 없다. 죽기 전의 생도 마찬가지고. 문득, 그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어느 신문에도 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아직 살아숨쉬는 그 사람.

이에 맞물렸던 오늘 이 장면에 나는 울컥했다.
요즘 나를 가장 열광시켰던 키타무라 코우(《크로스 게임》) 는 이런 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사람이 정말로 죽는 건, 그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야." 그래, 역시 넌 감동이었어! 지하철에서 나는 가슴 벅찬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마 지하철에서 만화를 보면서 눈물을 떨구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면, 그건 나였다.^^;;)

몇 차례 말한 것 같은데, 나는 지금 시즌3이다.
시즌1이 친구를 비롯한 선후배, 지인의 결혼식. 시즌2가 그 사람들의 아이 돌잔치. 그리고 몇 년전부터 지금 보내고 있는 시즌3, 친구, 선후배, 지인들의 부모님 장례. 물론 시즌1이나 시즌2가 간혹 중간에 끼기도 하지만, 시즌3가 지배적인 지금, 나는 여전히 세계의 소멸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남들) 결혼이나 돌잔치는 이제 시큰둥해서 다소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되지만, 시즌3의 기제는 그렇지 않다.   

살다보면,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몇 개 있다.  
나한텐 그 중 하나가 한 세계의 소멸, 즉 죽음이다. 각기 다른 색깔과 이야기를 품은 세계가 종말을 구하는데, 나는 어찌 그것에 익숙해질 수 있겠나. 그것은 익숙해지지 않아도 할 수 없다. 평생 나는 얼마나 많은 죽음 앞에서 낯설어 할 것인가. 궁금하면서도 내 죽음의 순간도 떠올려본다. 날 떠올려주는 사람들에게 난 어떤 말을 해줄까. 익숙해지지 않는 어떤 슬픔, 내가 할 수 있는 건 명복을 빌어주는 일밖에 없다. 기쁨보다 슬픔과 아픔이 더 많은 사람의 생. 그 생을 마무리했으니,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가시길...

아참, 익숙해지지 않는 것 또 하나.
프러포즈. 오늘 한겨레를 보다가 오오~ 단 세줄의 카피. 지혜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진. '선영아, 사랑해'부터 바이럴 마케팅에 워낙 익숙해져 있는 터에다, 다른 면도 아니고 5면의 통광고여서, 짝퉁에도 혐의를 두다가 품새를 보아하니,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짝퉁 아닌 '진품'이었다.  "지혜야, 나랑 결혼하자" 신문광고의 사연은…

한때 다녔던 미디어오늘에서 아니나다를까, 광고의 궁금증을 풀어줬는데, 내가 현재 다니고 있었다면, 내가 궁금해서라도 취재에 들어갔을 것 같다. 그래, 아버지는 돌아가셔도 살아남은 자는 생일을 맞고, 결혼도 하게 될 일이다. 아무렴,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살아있으니 가능한 프러포즈. 그것만큼은 부러울세, 이 친구.


오지랖 넓게 두 마디 덧붙이자면, 한겨레니까, 가능한 광고(여기엔 몇 가지 함의가 있다!ㅋ). 지혜라는 이 여성의 사진, 아마 몰래한 프러포즈니 초상권 허락받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름 진정성이 느껴지긴 하나, 이 여성은 감동했을까, 전국 만방에 이름과 얼굴이 팔렸으니, 당황하면서 화를 냈을까. 커피 만드는 노총각은 괜히 그런 것이 궁금해지는군. 쯧. 하나 더. 7월2일 그들은 결혼할까? ㅋㅋ 미디어오늘이나 한겨레는 그날, 기사 써야겠지? ㅋㅋㅋ (헌데,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 신문을 펼쳐 본 사람들은 스튜어디스 얼굴 한 번 더 보게 되겠군. 저 하늘 위에서 축하받는 기분, 어떨까?)

내 작은 바람이라면, 지혜씨를 향한 서 아무개씨의 공약, '영원히'. 저 단어가 지켜졌으면 좋겠다. 내 유부남 고딩 동창들과 장례식장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면서 생각한 어떤 사랑들의 속살 때문에! (어쨌든 두 사람, Soul 36.6에 오면 카푸치노와 더불어 생초콜릿 제공, 약속하겠소~)

더불어, 서 아무개씨는 가르쳐주지 말고 그냥 실천하면 더 좋겠고! 감 놔라 배 놔라, 노총각이 미쳤군. 코우는 와카바의 꿈을 이뤘고, 아오바와도 손을 잡았다. 거짓말해도 괜찮다면, 야구 소년과 야구 소녀의 맞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아다치 미츠루는 물론 그것까진 말해주진 않아! ㅠ.ㅜ 세계는 그렇게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괜히 묻고 싶어졌다. 잘 있나요? 내 첫사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