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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미디어

[정은임①]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2004. 8)

정든님, 정은임 누나가 떠나던 해. 그해 여름.
그리고 떠나던 그날. 많은 비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처럼.

자신만의 분명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던 '착한 미디어' 정은임.

무슨 이유에선지 당시 나는 무엇이든 써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미디어오늘에서 기자칼럼의 형식을 빌어 누나의 명복을 빌고 나름의 추모사를 썼다.
그리고 3년. 세상의 엄혹함은 강도를 더하면 더했지, 전혀 나아질 기미는 없다. 이랜드, KTX...

다시 다가오는 시즌. 만약 살아있다면 누나는 어떤 말을 우리에게 건네줬을까.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www.worldost.com
그들에겐 다시 정은임을 꺼낼 시간.
3년 전, 누나를 그리며 썼던 추모글.
다시금 정은임 추모기간.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기자칼럼] 정은임 아나운서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먼저 꺾어 식탁을 장식하듯,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가 천국을 장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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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요절에는 이같은 경구들이 나붙곤 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는 것을 더 이상 공유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마음은 그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나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과의 괴리를 표현한 것일까.

어쨌든, 사람살이는 늘 그렇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진실. 불의의 사고이건, 스스로의 선택이건 천국을 장식하기 위한 떠남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보내고 갑작스레 보낼지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면서도 이에 충분한 대비를 할 수는 없다. 아직 천국 장식용으로 누군가를 보내기엔 마음속에 너무 깊이 박힌 사람들이 있다.

정은임 MBC 아나운서가 천국을 장식하기 위해 떠났다. 인과관계는 전혀 없고 우연이겠지만, 정은임을 품고 살던 사람들에게 그녀가 떠난 4일 오후 그렇게 많은 비가 쏟아진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달 22일 차량 전복으로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토록 쾌유를 바라마지 않던 사람들의 희망은 결국 부질없음으로 귀결됐다. 희망이란 것이 애당초 부질없음을 전제로 하지만 그 부질없음에라도 기대고 싶은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희망의 연가는 이제 명복의 비가로 바뀌었다.

그렇게 좋아한다던 리버피닉스가 지난 93년 10월 세상을 등졌을 때, 그는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이젠 그가 세상을 등졌고 그의 팬들은 울먹이고 있다. 그는 이제 천국에서 리버 피닉스를 만나게 됐다.

그의 교통사고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전, 그가 실려 간 병원의 한 간호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정은임 아나운서가 교통사고로 위중하다는 글을 적어 이른바 ‘네티즌 특종’을 내놓기도 했다. 그 블로그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발 무사하시길... 제발 아무 일도 없길...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고 적혀 있었다.

‘정은임’을 마음에 담다

누군가는 정은임의 떠남으로 자신의 20대도 떠났다고 토로했다. “당신이 있어 물 찬 장화를 신은 것처럼 불편하고 고달팠던 20대를 버틸 수 있었다”고 “이제는 저도 당신처럼 그 누군가의 20대를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겠다”는 다짐. 그 끝에는 “사랑합니다”라는 뒤늦은 고백을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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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지난 4월까지 진행했던 ‘정은임의 FM영화음악’ 홈페이지 화면.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과거로 돌아갔다. 이제 ‘정은임’은 마음에서만, 기억의 회로를 돌릴 때에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됐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치지 못한다. 희망의 불꽃을 지피던 그 나지막한 음성은 없다. 디지털로 박제된 ‘과거’만이 남아 있게 됐다. 마음에서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누군가를, 무언가를 담아둔다. 사랑, 우정, 존경, 선망 등과 같은 이름부터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여러 모습으로. 상황에 따라 경계를 오가며 그 모습을 바꾸기도 하지만 쌍방향이건 일방통행이건, 신호등을 무시하건 그렇지 않건, 한가지건 여러 가지건, 일단 마음에 담기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채우기 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Before’와 ‘after’의 간극을 메우는 건 애당초 불가능이다.

그래서 마음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다. 컵에 물을 채운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 씻으면 그만이라고? 천만의 말씀. 씻는다고 그 컵에 담겼던 물의 기억이 깡그리 없어지지도 않고 씻을 때 사용한 물이며 퐁퐁의 향내는 미세하게 컵을 ‘예전과는 다름’으로 인도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기억. 그건 숨이 멎는 그날까지 미풍에도 흔들거릴 수 있는 잎새다. 그래서 마음에 담겼던 대상을 잊었다고, 지웠다고 애써 자위하는 건 무의미하다.

나 역시 그의 팬이었다. 그는 내 마음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충직한 팬은 아니었다. 사실, 대학시절에 새벽 2~3시를 관통할 때는 술 먹을 때였지,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어쩌다 듣던 라디오. 그냥 그 존재만 각인하고 ‘정영음’ 매니아들의 무용담만 얼핏 들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은임은 뉴미디어시대의 도래와 함께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스타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PC통신에서 만들어진 ‘정영음’은 아나운서를 위한 최초의 팬클럽이었고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TV프로그램도 아니고 라디오 중에서도 누구나 잠들어있을 법한 시간대, 그것도 영화음악이라는 한정된 장르를 다루고 있었지만 정은임을 향한 팬들의 애정은 남달랐다.

그건 바로 정은임의 ‘힘’이었다. 정은임은 어쩌면 한 시대의 ‘초상’이었다. 그 90년대 ‘영화’를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정은임은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그의 분신이던 정영음은 영화강좌 역할을 했으며 당시의 영화 붐을 주도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불을 끄고 잠자리 맡에서 듣는 정은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결기가 묻어있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수성의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정은임이 들려주는 영화음악들은 영화보다 더욱 감미롭고 마음을 헤집기도 했다. ‘정영음’은 그렇게 브랜드화 되어갔다.

정은임은 또한 그렇게 다가왔다. 작은 목소리에도 나는 귀를 기울였고 내 마음에 정은임이, 정영음이 담겼다. 마음의 끌림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자연스런 흐름이다.

마이너를 위하여

여러 보도를 통해 나타났듯 당시 정영음과 관련한 무용담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정은임은 20세기 반공 파시즘의 흔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갗와 80년대 대학생들의 애창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중파 라디오를 통해 전파(!)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의 죽음’을 방송을 통해 추모했다.

정은임은 그랬다. 멜랑꼬리한 말로 한밤중 어스름이 안겨주는 낭만을 마냥 읊조리지 않았다. 영화와의 연결고리를 찾아 사회와 인간, 소외, 노동, 빈민 등에 대한 자신의 색깔을 입혀 청취자들에게 작지만 호소력 있게 속삭였다. 그것이 정은임이었고 많은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새벽녘의 라디오방송이 마냥 ‘잠자기’만을 위한 ‘수단’이 아님을 정은임은 증명했다. 과연 정은임이 아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건 정은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정은임을 향한 소리없는 열광도 거기서 비롯됐다. 한 사람이 세상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

정은임은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새벽녘의 공기를 뚫고 정은임의 목소리는 그렇게 청취자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내게도 그래서 ‘정은임’은 달콤함만을 선사하던 당의정이 아니었다. 때론 사회의 아픔을, 치부를 폐부 깊이 밀어 넣던 쓰디쓴 극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꿀꺽 삼키고 소화해야 할.

나는 소망한다, 그 군불이 횃불이 되길...

그런 정은임의 떠남과 복귀, 그리고 다시 떠남은 그래서 극적이었다.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께요”라는 마지막 멘트가 흘러나오고 정은임은 울먹이고 있었다. 팬들도 함께 울먹였고 마지막 그 멘트는 MP3로 저장돼 인터넷을 배회했다. 정영음의 팬들은 그렇게 정은임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10월 정은임이 다시 ‘정영음’으로 돌아왔다. 유학의 길에서 돌아와 다시 ‘정영음’을 꾸렸다. ‘두렵다’는 고백에도 불구, 정은임은 여전했다. 정영음의 부활했고 그 젊은 혹은 어린 날의 기억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그건 누군가의 말마따나 오아시스였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는 금방 말랐다. 목마른 갈증을 해소하기엔 지독하게 부족했다. 지난 3월 MBC라디오의 봄 개편은 정영음을 다시 ‘한때의 기억’으로 몰아넣었다. 팬들과 청취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정은임의 목소리는 다시 그렇게 공중에 흩날려야 했다. 다만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란 기대만이 가슴 속에서 자맥질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도 이제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됐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 잃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가슴 속에 담아둔 무언가를 영영 떠나보내고 그 공간을 영원히 과거의 것으로만 박제해 놓아야만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기억 혹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조차 상실하게 되는 건 마음 한 칸을 비워내야 한다는 얘기다. ‘Before’와 ‘After’의 간극을 메울만한 대체재는 없다.

나는 그의 죽음 앞에 울고 싶었다. 정말 이제 다시 어디에서도 정은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지난 봄 개편 때 없어진다는 소리에도 다시 돌아올 것이란 ‘희망’으로 채웠던 가슴이 덜커덩 발밑까지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이미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사랑을, 내 마음의 불꽃을 꺼뜨릴 수는 없는 법이다. 내 가슴을 따뜻하게 지펴주던 정은임의 목소리를 'Delete' 키를 누른다고 없앨 수는 없다.

정은임의 죽음을 추모하는 팬들도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되새김질하겠지만 아마도 일상은 곧 이를 덮을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코미디 프로나 드라마를 웃고 즐기며 친구들과 술 한잔을 나누며 일상과 줄다리기를 계속 할 것이다. 그러다 어쩌다 한달에 한번이 됐건, 1년에 한번이 됐건, 어느 순간 정은임을 떠올릴 것이다. 그게 대개의 사람살이지만 'before'와 'after'는 분명 다르다. 문득 그가 보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가슴이 저릴 것이다.

정은임을 사랑하는 팬으로서 나는 소망한다, 정은임이 피웠던 그 군불이 횃불이 되기를. 어떤 횃불에도 꿈쩍도 않을 것처럼 냉랭한 이 세상에서 금지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다는 말.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정은임은 그렇게 누군가의 가슴을 영원히 따뜻하게 지펴줄 것도. 정은임이 지난 4월 마지막 ‘정영음’ 방송에서의 마지막 오프닝 멘트로 했던 그 ‘서시’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안녕하세요?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말로 여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 입니다.

단 한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