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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미디어

[정은임②] 근 1년여 만에 다시 꺼내보는 당신의 이름입니다 (2005. 8)

그리고 1년이 지났다.
한 사람의 부재가 불러온 균열.
before 와 after 의 간극.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죽지 않는 이상 일상의 힘을 이겨낼 재간은 없다.
일상의 힘은 세다.
그걸 버티고 견뎌내는 것이 장삼이사의 생이다.
누나가 떠난 1년.
세상은 어찌할 수 없는 소용돌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절망을 이겨낼 힘 역시 일상이었다.
생은 그래서 언제나 'on air'다.

누나가 떠난 1년 뒤, 여전히 나는 미디어오늘에 있었다.
기자수첩을 쓸 차례였는데,
딱히 다른 것도 없고,
시기도 누나를 떠나 보낸 1년이 다 된 시점이었다.
그래서,
누나에게 묻고 싶었다.
"잘 지내세요" 혹은 "오겡끼데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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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이죠? 근 1년여 만에 다시 꺼내보는 당신의 이름입니다. 잘 지내시나요. 그렇게 좋아하던 리버 피닉스와도 조우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만나고 헤어지며 또 잊혀집니다. 견디기 힘든 사실이지만 그것이 또한 사람살이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억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그저 차츰 옅어지고 희미해지는 기억의 자락을 아쉬워하는 외에는.

당신이 세상에 없었던 시간, 세상은 그 공백에 개의치 않은 채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습니다. 사실 당신이 떠났던 시간에서 별달리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고공 크레인 위에서 목숨 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어느 일하는 아버지. 그런 그가 끝내 마지막 편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던 그 엄혹한 풍경에서 한 치의 나아감도 없습니다.

당신의 말마따나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류 미디어들이 그들의 외로움을 알아주지 않는 것도 여전합니다. 아니 그저 정략적인 암투를 벌이거나 자본과 상열지사를 나누느라 신경 쓸 여력도 없겠죠.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스타워즈 에피소드Ⅲ’)의 사고를 빼다 박은 전쟁광의 농간에 휘둘리는 전쟁의 기운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을 통해 반전을 이야기하던 당신의 멘트를 귀담아 듣지 않았나 봅니다.

새삼 알지 못했던 일인 양 주류 미디어를 통해 까발려진 정·경·언 유착의 악취, 방송에 나온 인디밴드의 파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통제적 발상.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만큼 세상은 시끌벅적합니다. 이런 시절, 당신의 목소리는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요.

제대로 분노할 줄 모르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분노’를 담아내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란, 어쩌면 허섭쓰레기 같은 굴레의 연속입니다. “신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을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이것을 무시하는 작자”(‘아일랜드’)라는 시니컬함이나 드러내고 말 일이죠. 

낭랑하지만 땅을 굳건히 발을 디딘 그 목소리. 당신이 떠난 지 1년이 되는 4일. 디지털화돼 이제는 박제된 당신의 음성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한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하던 당신의 군불이 횃불이 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잘 지내세요. (2005. 8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