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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털 싱글스토리

오래된 목욕탕을 가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다...

영화를 핑계로 고향을 찾았다. 뭐 영화 때문에 고향을 찾은 거라고 봐야 더 정확한 것이겠지만. 이젠 거의 이방인처럼 간혹 낯설게도 느껴지는 고향. 부모님도 그곳을 떠나신 마당이니, 내 고향은 그저 추억으로만 충전해놓고 방전시킬 뿐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여전했고, 영화는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10월의 부산만큼은 '달콤한 나의 도시' 아니겠는가.

그러다 우연찮게, 내 살던 동네에 발을 디뎠다. 예기치 않았던 방문.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도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던 차였다. 무엇이 날 이끌었을까. 전날의 과음 때문이었을까. 전날 목욕을 못해 찌뿌둥한 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쉬고 싶어서? 목욕탕이 떠올랐다. 그 오래전 목욕탕은 그대로일까, 아니면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니, 그 목욕탕이 아직 그 자리에...

그 오래된 목욕탕이 아직 같은 이름으로 숨쉬고 있었다. 주변 서식 환경은 온통 바뀌었는데, 홀로 독야청청이 아니던가. 호기심이 일었다. 내부는 좀 바뀌었을까. 저런. 구조는 똑같았다. 근 20년 이상된 목욕탕이었다. 그곳을 드나들었던 첫 시기가. 그리고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드나들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평일이라서 사람은 그닥 없었다.

탈의를 하고 욕탕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멈칫했다. 아버지가 내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그래, 아버지... 아버지가 거기 계셨다. 이제는 할아버지 소리를 들어도 좋을만큼 훌쩍 연세를 드신 아버지가, 갈퀴를 휘날리며 초원을 누비던 그 모습으로 있었다. 어린 나와 동생의 때를 밀어주고 있는 아버지...

그래, 아버지는 그때 젊.었.다. 용.맹.했.다. 아버지의 등은 크기만 했다. 밀어도 밀어도 때는 계속 나올 것만 같았고, 고사리손을 한 나는 아버지의 등이 미웠다. 늘 그건 내 몫이었다. 동생은 나보다 더 작았다. 주말마다 아버지는 우리 두 아들을 목욕탕에 함께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는 간혹 목욕이 끝나고 나면 맛난 음식을 사주시거나, 신발이나 옷을 보러 가기도 했다. 그래 목욕탕에 가는 건 좋았지만, 아버지의 등을 밀어야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물론 고사리손이었을 때까지만.

그 목욕탕에서 우리들의 순서는 늘 정해져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순서를 따라갔다. 동선도 따랐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지만, 그 목욕탕만은 시간이 멈춘 것일까. 모든 것은 떠나게 되어 있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이미 다른 시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지 않던가. 한때 우리 곁에 머물렀던 그 무엇들은 하나둘 우리를 떠나갔는데...

며칠 전, 아버지가 힘이 빠진 모습으로 쉬이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하던 순간이 생각이 났다. 그 말을 들은 직후엔 짜증도 났다. 하지만, 당신은 그 말을 얼마나 힘들게 꺼냈을 것인가. 나는 어떻게 훌쩍 이렇게 자라났을까. 그 고사리손들을 이끌고 목욕탕에 갔던 아버지. 내 어린 모습보다, 아버지의 젊은 모습이 수증기와 함께 먼저 찾아왔다. 눈시울이 무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저 목욕탕이 아직 있는 것이 신기했을 뿐인데...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 목욕탕을 찾은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 목욕탕엔 아버지가 있었다. 계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나는 더이상 등을 밀어주지 않고 있는 아버지의 등이 그리워졌다. 그 자리에서 예전처럼 밀어주고 싶었다. 이젠 나는 고사리손이 아니고, 아버지의 등은 쪼그라들었다. 아버지의 등이 문득 그리워졌다. 오래된 목욕탕에서 만난 아버지는 정글의 왕처럼 용맹해보였다. 그런 아버지는 이제 이빨 빠진 맹수로 기력이 하나둘 빠지고, 나는 그런 아버지의 나이에 다가가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의 나이에 슬슬 다가가고 있지만, 나는 아직 싱글이고 아이 역시 없다. 아들의 생은 아직 길지만, 아버지의 생은 이제 길지 않다. 살아간 날보다 살 날이 적다는 얘기다. 나는 아직 아버지를 온전하게 이해하진 못하지만, 고향에 다시 같이 갈 기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그 오래된 목욕탕을 들러봐야 할 것 같다. 그때까지 목욕탕이 있어줘야겠지만. 아버지는 그럴 때 미소를 짓지 않을까. 예전보다 힘이 세졌다면서...

나도 늙었나보다.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나보다.
그런데 싱글도 아버지가 될 순 있겠지?